[역경의 열매] 김형석 (5) 학도병 징집 압박에 기도… 신검서 ‘불합격’

입력 2020-12-21 03:01
1940년대 초반 유학 중이던 일본 도쿄 조치대학교 교정에서 찍은 단체 사진. 김형석 교수(앞줄 오른쪽 끝)와 김수환 추기경(앞줄 왼쪽 끝)의 모습이 보인다. 양구인문학박물관 제공

중학교 5년 과정을 힘겹게 마친 나는 고향으로 돌아와 소학교에서 1년간 교편을 잡았다. 가난한 집안의 맏아들로서 가정 경제에 보탬이 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항상 대학을 꿈꿨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번민하는 모습을 본 모친은 “내가 아직 이렇게 건강한데 동생들과 굶어 죽기야 하겠니. 집 걱정하지 말고 대학에 가거라”고 권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으나, 아들인 나에 대한 주님의 뜻이 있을 거란 믿음으로 한 말씀이었다.

철학과를 지망한 나는 일본 도쿄의 조치대학교에 지원해 입학했다. 조치대는 가톨릭계 대학으로 독일 교구에 속해 있었지만, 독문과보다 철학과에 더 큰 비중을 두는 학교였다. 스콜라철학을 중점적으로 가르쳤기에 가톨릭 신부가 되려는 학생들도 철학과에 지망하곤 했다. 후배인 고 김수환 추기경과는 이곳에서 함께 수학한 인연이 있다. 철학도를 자처한 나는 톨스토이를 비롯한 인도주의적 문학책과 키르케고르, 하이데거, 쇼펜하우어 등 여러 사상가의 책을 폭넓게 읽었다.

대학 생활을 마무리할 때쯤, 나를 포함한 한인 유학생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전세가 불리해진 일제가 대학생과 휴학생,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인까지 전장에 보내기로 한 것이다. 한인 학생 역시 ‘자원입대’ 대상자가 됐다. 말은 자원이었지만, 실제로는 경찰을 동원해 압박을 넣었다. 일본인들이야 조국을 위한 출정이라지만, 우리로선 원수 국가인 일본의 군인으로 끌려가는 것이었다. 굴욕감과 울분을 호소할 길이 없었다. 그 와중에 일본 경찰과 공무원은 “한인 학생이 일본 학생 못지않게 애국심으로 입대한다”며 선전했다. 많은 한인 유학생이 좌절해 술에 빠져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내 생애를 좌우할 중차대한 사건이 닥쳐오자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일간 외부와 연락을 끊고 하숙방에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주님의 뜻을 물었다. 요한복음 15장을 읽던 중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게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 눈물이 주룩 흘러내리며 마음에 음성이 들렸다. “주께서 나를 택했다. 그렇다. 내가 내 삶을 사는 게 아니다. 주님의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곧 책상에 엎드리고는 “하나님 아버지”라고 외쳤다. 내가 드린 ‘세상에서 가장 짧은 기도’였다.

이윽고 평안을 되찾았다. 징집이란 폭풍우 속에서도 나는 조용히 책을 읽으며 기도하는 생활을 지속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인데, 내가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학도병 징집을 위한 검사를 받으러 갔다. 책임자급으로 보이는 내과의사가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어릴 때부터 앓던 병이 있느냐”고 물었다. “가끔 의식을 잃곤 했다”고 말한 뒤 몇 가지 질문에 더 답하자 그는 내 서류에 ‘불합격’이라 적었다. 기적적으로 학도병의 굴레에서 벗어난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인 학생 여럿이 군에 끌려가 남태평양이나 중국 전선에 투입됐다. 나라 잃은 민족의 비극이었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