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는 도대체 어디를 찾아가야 하는 거죠.” 여야 대표나 총리, 주요 장관이 신임 인사나 업무 협조차 종단을 방문하려 할 때마다 나오던 하소연이다. 가톨릭이나 불교는 한 곳만 가면 되는데 개신교는 왜 아니냐는 물음에 답할 말이 없었다. 뿔뿔이 흩어지고 갈라진 한국교회의 민낯을 드러낸 것 같았다.
개신교는 다양한 교파와 교단으로 구성돼 있다. 지도부의 말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중앙집권 구조와 거리가 멀다. 대신 공교단이 참여하는 연합기관 형태로 대외적 목소리를 내고 연합과 협력을 도모해왔다.
한국교회 연합기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은 1924년 출범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다. 민주화와 인권운동에 크게 기여했지만, 한국교회를 대표하기엔 회원 교단이 적고 성향도 주류와 다소 거리가 있다. 89년 설립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는 한때 한국교회의 대표 연합기관으로 부상했으나 2011년 금권선거 파동 이후 분열됐다. 이후 주요 교단의 탈퇴와 보류, 일부 이단의 가입, 소수의 전횡, 극단적 정치·이념 성향 등이 이어지며 대표성을 상실했다. 한기총 대안으로 2012년 설립된 한국교회연합(한교연)은 통합에 소극적 자세를 보이다 주요 교단으로부터 외면받았다.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은 한기총과 한교연을 아우르는 대통합을 모색하며 가장 늦은 2017년 12월 출범했다. 기존 연합운동에 대한 반성에 기초해 교단 중심의 연합기관이라는 새로운 틀을 갖췄다.
2010년대에는 2개였던 연합기관이 4개로 늘어난 분열의 시대였지만, 90년대와 2000년대는 달랐다. 90년대 말에는 NCCK와 한기총의 통합이 성사 직전까지 갔을 정도로 추진됐다. 두 단체는 2008년부터 3년간 부활절 연합예배를 함께 드리며 하나 됨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한기총의 분열과 파행은 이 같은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한국교회에 ‘잃어버린 10년’이 찾아왔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라는 말씀이 무색했다.
이를 틈타 신천지 같은 사이비·이단들이 발호했다. 음지를 벗어나 도심의 주요 교회와 교계 단체 앞에서 정통교회를 비방하며 세를 과시했다. 구심점을 잃은 한국교회는 현안 대처 능력도 약해졌다. 저출산 고령화, 생명존중, 국정농단, 한반도 평화 등 정치·사회적 이슈에 힘 있는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한국교회 공교단을 중심으로 출범한 한교총은 분열과 무기력에 대한 자성의 결과물이었다. 초반에는 비관론이 우세했다. 한기총 한교연처럼 분열된 또 하나의 연합기관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한교총은 쉽고 편한 길을 택하지 않았다. 일부 교회나 교단, 세력에 의존했다면 급속도로 세를 키울 수 있었겠지만, 공교단 중심의 원칙을 지켰다. 소수에 의한 독주 대신, 느려도 함께 가는 길을 택했다. 당장은 미약해도 주요 교단이 모두 참여하고 교회정치에 휘둘리지 않는 건강한 구조를 갖췄다는 점에서 한국교회의 하나 됨에 대한 기대를 하게 했다.
이 같은 기대는 코로나19 팬데믹 가운데 현실이 됐다. 한교총은 대정부·대사회 창구 역할을 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코로나19 1차 대유행 때만 해도 느슨하던 정부와 교계의 관계가 2차와 3차 대유행을 거치며 체계적으로 정리됐다. 정부와 여야도 한교총을 한국교회의 대표 연합기관이자 교계와의 소통 창구로 인정했다. 정치인들의 종단 방문 때 한교총은 필수코스가 됐다.
대내외 위상이 높아진 만큼 한교총의 어깨는 무거워졌다. 그 역할은 교회 내에 제한되지 않는다. 한국 사회와 국민에게도 위드 코로나에서 포스트 코로나로 가는 길을 제시해야 한다. 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교회가 위로와 희망을 전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주요 선거를 앞두고 정치의 파고에 휩쓸리지 않고 복음의 본질에 충실하도록 중심을 잡아야 한다. 초갈등사회에서 교회가 화해자 중재자로서 역할을 감당케 해야 한다. 2021년 한교총에 거는 기대가 크다.
송세영 종교부장 sysoh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