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사람 잔소리 같아도 예배회복 바라고 또 바라

입력 2020-12-18 16:44
정장복 한일장신대 명예총장이 지난 16일 서울 송파구의 개인연구실 예설멘토링센터에서 2021년판 ‘예배와 설교 핸드북’을 들고 지난 40년 동안의 소회를 전하고 있다.

“보람이라면….” 78세의 노교수는 잠시 말을 멈췄다. “교회력에 따른 성서정과를 한국교회에 소개한 것, 그게 큰 보람입니다. 그사이 38세의 젊은 교수가 여든을 바라보는 노인이 됐네요.”

매년 개정판을 내며 목회자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은 ‘예배와 설교 핸드북’(핸드북)의 저자 정장복 한일장신대 명예총장이 2021년판 핸드북을 끝으로 집필을 중단하기로 하면서 전한 소회다. 그의 손을 거친 마지막 책은 지난달 세상에 나왔다.

지난 16일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개인연구실인 예설멘토링센터에서 만난 정 총장은 인터뷰 중 여러 차례 수십 권의 핸드북이 꽂혀 있는 서가로 눈길을 줬다. 자신의 삶 전체를 조망하는 듯 보였다.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예배와 설교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고 1981년 귀국한 정 총장은 서울 광진구 장로회신학대 강단에 섰다. 이때부터 ‘예배와 설교 캘린더’를 제작해 교회력에 따른 성서정과를 소개했다.

이전까지는 교회력에 대한 개념조차 희박했다. 교회력은 대림절에서 시작해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오순절로 이어진다. 절기에 따른 성서정과란 교회력에 맞는 성경 구절을 뜻한다. 정 총장이 만든 핸드북에는 절기뿐 아니라 매일의 성서정과까지 담겨 있다.

1981년 정장복 총장이 처음으로 만든 예배와 설교 캘린더. 1984년판 예배와 설교 핸드북 모습(왼쪽부터).

캘린더가 책으로 바뀐 건 84년부터다. 이후 38권의 핸드북이 세상에 나왔다. 해마다 목회계획을 짜는 목회자를 돕기 위한 정세 분석 문서인 ‘회고와 전망’을 썼고 절기에 맞도록 성경구절도 개정했다.

교회력에 따른 성서정과를 활용하는 것은 전 세계 교회가 따르는 전통이다. 절기에 맞는 성경 구절을 본문으로 하는 설교는 신앙생활에 유익하다는 게 정 총장의 소신이다. 달력을 보며 하루를 살듯 교회력에 따라 성경을 읽으며 신앙생활을 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이런 전통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정 총장은 질서가 무너진다고 했다. 그는 “71년 목사 안수를 받자마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그때 처음으로 여섯 개나 되는 교회 절기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서 “더욱이 미국 목회자들이 절기에 따라 정해진 성서정과를 기준으로 설교하는 걸 보고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이어 “대강절에는 엄숙한 설교가, 주현절에는 선교, 사순절에는 참회, 부활절에는 환희와 승리에 대한 말씀이 펼쳐지면서 교회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회상했다. 귀국 후 이런 교회 전통을 소개하기로 한 그는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이 자료가 초창기 핸드북의 토대가 됐다.

그의 캘린더를 받아 본 교계의 반응은 뜨거웠다고 한다. 정 총장은 “당시만 해도 목회자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교회 절기와 관계 없이 설교 본문으로 채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면서 “그런 풍토의 교계에 우리가 모르던 교회 전통을 소개하니 목회자들의 관심이 대단히 컸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개신교가 세계교회와 함께 호흡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었던 게 큰 자부심이라고 한다.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정 총장은 “교회 현장에서는 여전히 성서정과를 따르지 않는 설교자들이 많다”면서 “심지어 고난주간에 세상적 성공을 비는 설교가 강단에서 선포되는 일까지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를 바꾸는 것 또한 핸드북을 쓰게 될 제자들의 몫이라고 밝혔다. 정 총장은 “사실 70세 은퇴하면서 핸드북 집필을 제자들에게 바로 넘겼어야 했는데 욕심을 부려 지금까지 쥐고 있었다”면서 “하지만 이제는 제자들이 창의적으로 핸드북을 잘 만들어 갈 거라 믿는다”고 말했다. 캘린더부터 시작해 40년 동안 이어온 역작은 제자들을 통해 계속 출판될 예정이다.

전남 완도군 청산도에 있는 ‘정장복 박사 신학관’ 전경. 예설멘토링센터 제공

그의 고향은 전남 완도의 청산도다. 2000여명이 사는 섬에 2016년 자신의 이름을 딴 신학관을 세웠다. 이곳에는 전마선(傳馬船) 노를 젓던 정 총장의 어린 시절 사진과 그가 쓴 모든 저서가 전시돼 있다. 앉아서 책을 읽거나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카페도 있다. 전마선은 큰 배와 육지, 배와 배 사이를 오가던 작은 배를 말한다.

정 총장은 청산도에서 평신도를 위한 예배와 설교 가이드북을 쓸 예정이다. 그는 “청산도는 어린 시절 꿈과 희망, 신앙이 자라던 공간으로 그림처럼 아름다운 섬”이라면서 “서울의 연구실과 청산도의 신학관을 오가며 평신도의 신앙을 키우기 위한 책을 쓰며 노년의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끝으로 교인들에게 당부를 했다. 정 총장은 “늙은 사람 잔소리 같아도 중요한 이야기”라면서 “코로나19 이후 한국교회가 예배당을 중심으로 경건한 예배를 회복할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예배학자로 일생을 살아온 노교수가 전하는 ‘거룩한 잔소리’로 들렸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