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구합니다(A Computer Wanted).”
1892년 5월 2일 미국 뉴욕타임스에 한 광고가 실렸다. 이는 ‘컴퓨터’라는 단어가 등장한 최초의 인쇄물이었지만 그 의미는 요즘과 사뭇 달랐다. 미국 해군천문대가 올린 글에서 컴퓨터는 하나의 직업을 뜻했다. ‘계산하다(Compute)’는 어의에 충실한, 계산과 연산을 수행하는 사람을 의미한 것이다. ‘인간 컴퓨터들’은 천문대에서 행성의 위치를 계산하거나 군에서 탄도 궤적을 계산하고 나치 암호를 해독하는 등의 일에 투입됐다.
이들은 계산한다는 공통점 외에 여성이라는 공통점도 갖고 있었다. 처음엔 드물었던 ‘여성 컴퓨터들’은 차츰 남성을 대체했다. 후일 계산 기계의 능력을 측정할 때 ‘걸이어(girl-year)’ ‘킬로걸(kilo-girl)’ 같은 단위를 썼을 정도로 계산이 여성의 영역이던 시절이었다. 이는 여성의 임금이 상대적으로 낮았던 것과 무관치 않다. 우주의 지도를 그리고, 목숨이 걸린 탄도의 궤적을 계산했지만 이들은 미숙련 노동자와 비슷한 임금을 받고 일했다.
여성, 계산기계에서 소프트웨어로
책 ‘세상을 연결한 여성들’은 미국 나사(NASA)에서 일한 흑인 여성 수학자들을 다룬 영화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를 떠올리는 초반부로 시작한다. 영화의 소재가 된 내용도 간단히 언급된다. 역사 속에서 잘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책과 영화는 공통점이 있지만, 책은 보다 통시적이다. ‘세상을…’은 컴퓨터와 인터넷 발전 역사에서 “중요한 물결이 시작되는 매 순간마다 나타”난 여성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컴퓨터 등장 전 프로그램을 작성한 에이다 러브레이스부터 초창기 컴퓨터에 생명을 불어넣은 여성들을 거쳐 인터넷으로 세상을 연결하기 시작한 여성들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최초의 프로그래머’로 불리는 러브레이스가 있지만 초창기 컴퓨터 등장 이후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여성으로는 그레이스 호퍼를 빼놓을 수 없다. 수학자였던 호퍼는 1942년 해군에 입대한 후 하버드에 있는 컴퓨터 마크Ⅰ을 전담하며 골치 아픈 수학 문제를 해결하는 코드를 썼다. 현대 컴퓨팅의 근간이 되는 ‘컴파일러(인간이 작성한 코드를 기계 수준에 맞춰 번역하는 일종의 중개 프로그램)’를 최초 개발했고, 국방부와 산업계에서 널리 쓰인 프로그램 언어 ‘코볼(COBOL)’ 탄생에 기여해 ‘코볼의 할머니’로도 불린다. 그녀로 인해 인간과 컴퓨터 사이의 소통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던 셈이다.
호퍼와 달리 책에 등장하는 ‘에니악 6총사’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전자 컴퓨터였던 에니악은 마크Ⅰ에 비해 처리 속도가 빨랐지만 프로그래머 역할을 한 6명의 여성이 없이는 성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계산 자체는 몇 초밖에 안 걸렸지만, 계산을 위한 준비에 하루가 족히 걸렸다. 인간과 기계를 이어주는 프로그래밍 언어가 없는 상황에서 가장 원시적인 방식으로 입력해야 했기 때문이다. 호퍼는 물론이고, 에니악 6총사는 컴퓨터라는 하드웨어가 실제로 돌아가도록 도와주는 ‘인간 소프트웨어’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이들의 역할은 무시되기 일쑤였다. 대표적으로 에니악의 탄도 궤적 공개 시연에서 6총사는 배제됐다. 시연은 15초 만에 끝났지만, 시연을 위해 6명이 몇 주 동안 애쓴 과정은 부각되지 않았다. 대신 에니악과 남성 동료들만 대서 특필됐다. “이 여성들은 남성 동료들과 나란히 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카메라의 플래시 전구를 기억했지만, 정작 신문에 실린 사진에는 정장을 입고 군 장식을 단 채 유명한 기계 옆에서 포즈를 취한 남성들만 보였다.” 호퍼 역시 종전 후 하버드와 해군의 계약이 만료되자, 연구실에서 해고되는 아픔을 겪었다. 민간 회사를 거친 호퍼는 다행히 해군으로 복귀해 프로그래밍 언어 팀을 이끌고, 해군 제독으로 퇴역했다.
초창기 컴퓨터를 움직였던 이들이 여성이었던 것과 달리 소프트웨어 업계에서 여성의 자리는 차츰 사라졌다. 같은 일을 하는 남성의 70% 수준인 임금과 육아 시설 제공에 대한 컴퓨터 회사들의 비협조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책은 적고 있다.
연결하는 여성들
1968년 탄생한 인터넷의 전신 ‘아파넷’에는 MIT나 스탠퍼드 같은 대학이나 일부 수학자, 공학자, 컴퓨터 과학자의 컴퓨터가 연결돼있었다. 아파넷은 당초 과학자들을 위한 리소스 공유 네트워크로 구축돼있었지만, 각자가 어떤 정보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선 정리돼있지 않았다. 스탠퍼드대 연구소에 합류한 제이크 파인러는 이러한 정보를 취합해 1000페이지 정도 되는 문서를 만들었다. 이는 인터넷의 기술 인프라를 최초로 문서화한 사례가 됐다. 요즘으로 치면 파인러는 네이버나 구글 같은 검색 엔진의 인간 알고리즘인 셈이다. 그녀는 오늘날 인터넷 도메인의 뒤에 붙는 ‘.edu’, ‘.gov’, ‘.org’ ‘.com’ 등을 제안하기도 했다.
한때 MIT 인공지능 연구실에서 유일한 여성이었던 래디아 펄먼은 네트워크 전체의 데이터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녀가 고안한 ‘신장 트리(spanning tree) 프로토콜’은 네트워크를 국지적 차원에서 확대해 인터넷 같은 대규모 네트워크로 연결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제가 없었다면 인터넷은 입김만 불어도 넘어져 죽었을 것”이라고 한 펄먼이었지만 그녀 역시 남성들로부터 지속적으로 무시를 당했다. 아이러니한 건 그 무시가 그녀를 구했다는 점이다. 그녀가 남성 동료들로부터 무시당하는 것을 지켜본 컴퓨터 회사 대표가 그녀에게 이직을 제안했고, 그녀는 이를 받아들인 후 신기술을 개발했다.
‘세상을…’은 이같은 기술적 측면 외에 여성의 인터넷 사용을 확대한 커뮤니티, 사이트, 게임 등을 만든 여성들도 잊지 않고 두루 소개한다. 오늘날 소셜 네트워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에코’를 만든 스테이시 혼, 웹상에서 발간한 최초의 잡지 ‘워드’를 만든 마리사 보와 제이미 레비의 사례 등은 인터넷 초창기 커뮤니티와 사이트의 출발에서부터 좌절까지의 과정을 살펴볼 수 있게 한다.
저자는 컴퓨터와 인터넷 발전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조명 받지 못한 여성들을 다뤘지만 “여성만을 위한 책”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책”이라고 적고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거기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는 책의 표현처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이들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됐다. 그렇다고 극적인 성공 스토리에만 초점이 맞춰진 책은 아니다. 때로 벽에 부딪치고, 실패했던 역사도 함께 담겨 있다. 관련자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목소리도 담았다. 한국판에는 저자의 인터뷰도 책 마지막에 실려 있다.
김현길 기자 h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