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한 미술] 액체처럼 흐르는 외관… 몽유도원도 속 한국 山勢가 보인다고?

입력 2020-12-17 04:07
영국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서울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는 외국인들이 찾는 한국의 랜드마크가 됐다. 사진에서 보듯 도마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진 외관이 특이한데, 이는 크고 낮은 산들이 중중첩첩 이어지는 한국 산세에서 영감을 얻었다. 최현규 기자

조선 시대 화가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이인문의 ‘강산무진도’. 모두 독자적 기법으로 높고 낮은 산들이 중중첩첩 아득하게 펼쳐진 산세를 표현한 두루마리 그림이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권에서 우리나라 산의 이런 특징을 서구의 ‘하이 마운틴(높은 산)’과 구별되는 ‘딥 마운틴(깊은 산)’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2007년 8월 서울시는 옛 동대문운동장 부지에 지을 디자인센터를 국내외 최고 건축가 8명을 대상으로 국제 공모를 했다. 최종 당선자인 이라크 태생의 영국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1950∼2016·아래 사진) 측이 프레젠테이션할 때 이 두 전통 회화를 제시했다는 얘기를 듣곤 퍽 놀랐다. 세계 최대의 3차원 비정형 건축물로 꼽히는 DDP는 천편일률적인 직사각형 건물이 지배하는 서울 도심에서 단연 튄다. 액체처럼 흐르는 거대한 몸체만으로도 낯설다. ‘불시착한 우주선’이라는 별명을 가진 건축물 아닌가. 이 구조물 어디에서 그런 한국적 산세가 구현된 걸까. 상상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세계 최대의 비정형 건물… 굽이굽이 산하를 추상화

2007년 오세훈 전 서울시장 시절 시작했고 고 박원순 전 시장이 마무리해 2014년 3월 21일에 문을 연 DDP는 ‘디자인 서울’의 상징이다. 이 건물, 내부로 들어서면 길을 잃기 쉽다. 총면적 8만6574㎡(약 2만6188평) 부지에 지어진 지하 3층, 지상 4층짜리 건물이 길게 한 덩어리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놀란 도마뱀이 V자로 몸을 구부린 것 같은 기이한 형태다. 그러면서 땅굴을 뚫어 공간을 구획 짓다 보니 공간끼리의 구별도 어렵다. 이쪽에서 보면 지하층인데 저쪽에서 보면 지상층인 곳도 있다. 또 평지를 걸었는데, 경사로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지붕 위에 서 있는 경험을 하게 되기도 한다. 외관뿐인가. 건물 내부도 모든 벽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바닥도 마름모꼴의 기형이다. 한창 시공할 때 설계 도면을 본 어떤 공무원이 “도면이 삐뚤어져 있으니 똑바로 펴 달라”라고 주문했다는 해프닝이 전설처럼 전해진다.

하디드의 설계안 제목이 ‘환유의 풍경’인 것은 그래서인가보다. 환유는 수사학적으로 간접적으로 상징하는 비유를 말한다. 바닥이 지붕으로 이어지고, 지상과 지하의 구분이 모호한 DDP의 유동적인 형태야말로 끝없이 펼쳐지는 우리나라 산하를 추상화시킨 건축 언어인 것이다. 영국 런던 자하 하디드 건축사무소 패트릭 슈마허 대표는 국민일보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액체처럼 흐르는 형태는 부정형의 땅에도 건축이 적용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즉 추상은 건축에 창조의 자유를 부여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DDP는 자하 하디드 설계 인생에서 이정표 같은 건물”이라고 강조했다.

‘곡선의 여왕’ 외장 패널 4만5133장의 신화

2004년 여성 최초로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받은 자하 하디드는 진보적인 분위기로 유명한 영국건축협회 건축학교(AA스쿨)를 졸업했다. 그가 지은 건물은 선이 기울고 액체처럼 흐르다 휘몰아치는 등 다이내믹하다. ‘곡선의 여왕’으로 불리는 이유다. 하지만 초기 활동 시기에는 구현할 수 있는 기술력의 한계와 예산상의 비효율성 때문에 시공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늘 도면 작업으로만 머물러 그에겐 ‘종이 건축가’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그런데도 추상 회화의 창시자인 바실리 칸딘스키의 미술 언어를 적용한 유기적이고 해체적인 방식으로 건축의 추상 시대를 연 그에게 전 세계 건축학도들은 열광했다.

현실화한 첫 건축물이 43세인 1993년에 독일의 비트라 가구공장에 만들어진 노출 콘크리트의 삐딱이 유리 건물 ‘비트라 소방서’이다. 이후 본격적으로 수주를 받으며 프랑스 파리 샤넬 모빌 아트 파빌리온(2010), 중국 광저우 오페라하우스(2010), 영국 런던 올림픽 수영 경기장(2012) 등 유선형의 건물을 잇달아 탄생시키며 명실상부한 ‘곡선의 여왕’이 됐다.

천장과 벽도 유선형으로 이어진 건물 내부 모습. 최현규 기자

자하 하디드 측이 “가장 혁신적이고 야심 차며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는 DDP는 그 혁신성 때문에 시공 과정에서 곡절이 많았다. 가장 난제는 도마뱀 모양의 비정형 외관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외벽으로 쓰일 무려 4만5133장의 알루미늄 외장 패널을 생산하는 것이었다. 한 장도 같은 크기와 모양이 없다. 심지어 휘어져 있기까지 한 외장 패널을 구하기 위해 시공사인 삼성물산은 자하 하디드 측으로부터 소개받은 독일 업체에 연락했다. “제작은 가능하나 생산에 20년이 걸린다”는 황당한 답변이 돌아왔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난감한 상황에서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당시 한국에서 가장 비정형 건물이었던 영종도 인천국제공항의 가오리 형 관제탑 제작에 참여한 한국의 외장 패널 제작업체 스틸라이프였다. 관제탑은 스테인리스 스틸이고 이건 알루미늄 재질이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망설이던 박광춘 스틸라이프 대표는 결국 ‘참전’을 결정해 갈수록 완성도를 높이며 임무를 완수했다. 과정을 지켜본 박진배 서울디자인재단 DDP 운영본부장은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DDP에 팔자가 있다면 아마도 아주 좋은 운명을 타고난 게 틀림없어요.” 한국 중소기업의 기술력이 뒷받침되지 못했다면 DDP 역시 ‘종이 건축’으로 남을 운명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외장 패널 제작이 어려웠던 또 다른 이유는 타공법으로 아주 작은 구멍을 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작은 구멍이 DDP가 가진 우아한 아름다움의 비결이기도 하다. 상상해 보라. 창문 하나 없는 어마어마한 덩치의 단일 건물이다. 단일한 색상의 평면으로 뒤덮였으면 숨 막힐 듯 답답하게 보였을 구조물은 이 작은 구멍들로 인해 비로소 숨 쉴 틈을 가질 수 있게 됐다. 거대한 덩치로 인해 폭력적으로 비쳤을 DDP는 무수한 타공 덕분에 여성적인 이미지로 아주 부드럽게 우리 앞에 손을 내민다. 또 구멍 안에는 LED 조명이 내장돼 밤에는 화려하게 피어날 수 있다.

지난해 연말 DDP 건물 전면을 스크린 삼아 영상 쇼를 했던 ‘서울라이트’. 서울디자인재단 제공

동대문운동장의 역사성… 뒷마당으로 유도하라

DDP는 헐어버린 옛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들어섰다. 동대문운동장은 일제 강점기인 1926년 조선총독부가 조선 시대에 군사훈련을 담당하던 훈련도감과 무기 제작을 하던 하도감 자리에 공설운동장을 세운 것이 시초가 됐다. 운동장이 건설되며 동대문에서 광희문까지 이어지는 한양 성곽은 없어졌다. 다행히 DDP 재개발 과정에서 한양 성곽의 유구와 이간수문, 하도감과 훈련도감의 유구가 발굴돼 이전 복원됐다.

DDP에 대한 한국 건축계의 비판은 대체로 장소가 가진 역사성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는 데 모인다. 유적은 건물 뒤쪽으로 감춰지고, 운동장의 기억은 달랑 남은 조명탑 2개가 전부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해 DDP 개관 5주년을 맞아 서울디자인재단이 기획한 ‘2019 DDP의 백도어를 열다’ 행사는 의미심장하다. DDP는 원래 지붕 위 전체를 걸을 수 있도록 설계됐으나 시공 과정에서 컨벤션센터가 29m로 크게 높아짐에 따라 안전성 문제로 보행 구간이 많이 축소됐다. 원래 의도를 살려 지난해 지붕 위를 걷는 기획 행사를 한 것이다. 최경란 서울디자인재단 대표는 “그동안 외관 홍보에 주력했다면 이제부터 그 속살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서울디자인재단이 역사와 문화의 속살을 더 깊이 볼 수 있도록 DDP 뒷마당으로 시민의 동선을 유도했으면 싶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조성된 그곳에서 보면 멀리 동대문 너머 성곽과 DDP의 도마뱀 꼬리 부분이 끊어진 듯 다시 이어지는 것 같다. 이간수문 등 조선 시대 유구와 동대문운동장 야간조명탑도 그곳에 보존돼 있다. 버드나무가 주는 운치를 감상하며 조선 시대 서민의 성 밖 나들이를 상상하고 야간조명탑을 가리키며 동대문운동장 시절 함성을 화제 삼을 수 있게끔 말이다.

손영옥 미술·문화재 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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