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잘못이 아니야, 너는 잘못되지 않을 거야. 박혜진 평론가가 소개한 ‘유원’을 읽으면서 속으로 반복하던 말이다. 그렇게 되뇌던 말의 첫 번째 대상은 물론 소설의 주인공인 유원일 테지만 저토록 간단하고 별것 아닌 말이 필요한 이들은 어디에든 있다. 그리고 그 말은 필요한 만큼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도리어 세상은 피해자에게 이상하리만치 가혹하여, 너의 잘못이 아님을 증명하라 요구한다. 피해자답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이라 강요한다. 당신 잘못일지도 모른다고 탓한다. 당신은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유원은 스스로는 비극의 끝에서 홀로 생존한 아이다. 화재 사고였다. 언제나 그랬듯 사고의 순간에도 빛이 나던 언니의 판단력은 빛났다. 유원은 이불에 감긴 채 창밖으로 던져졌고, 현장 아래를 지나가던 남성의 도움으로 구조된다. 언니는 목숨을 잃었고 남성은 불구가 됐다. 유원은 죄책감을 짊어진 열여덟 살이다. 웃을 수 없는 아이이고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인생이다. 꼬이고 비틀려 버린 친구다. 바라지 않던 운명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혹은 운명의 곁에 서 있던 타인이 유원의 삶을 강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복잡하고 미묘한 시선은 12년 전, 그날의 사고로 자꾸만 유원을 이끈다. 유원은 그날의 주변을 뱅뱅 돈다. 그날의 사고, 그날의 운명, 그날의 비극이 아니면 존재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살아야 했다. 동급생 수현을 만나기 전까지.
나의 잘못이 아니야, 나는 잘못되지 않았어, 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기까지 유원에게는 시간과 친구가 필요했다. 그리고 ‘유원’과 붙여 읽을 책에 시간과 친구가 필요한 또 다른 아이가 있다. 전작 ‘기분이 없는 기분’으로 아버지의 죽음 이후 깊은 우울증에 빠진 인물이 일상을 회복하는 이야기를 섬세하게 그려 낸 구정인 작가의 신작 ‘비밀을 말할 시간’의 주인공 은서가 그렇다. 은서의 고통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고도 아니고 또 다른 희생자를 낳은 비극 같은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평범한 놀이터에서 평범한 오후 시간에, 평범한 여자아이에게 일어난 범죄였다. 그 기억을 새삼 자각하게 된 계기마저 소름끼치도록 평범하다. 전철에서 일어난 성추행. 여러 형태의 성범죄는 피해자에게는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어느덧 평범한 일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도리어 피해자의 상처를 보듬고 가해자에게 합당한 벌을 내리기는커녕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고, 가해자의 사정에는 기이하게 관대하게 구는 일이 우리 주변에는 횡행한다. 평범하지 않아야 할 일이 괴이하게도 평범해진 셈이다.
책의 목차는 제목 그대로 은서에게 비밀을 말할 시간을 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어느 일요일 홀로 묻어둔 비밀과 눈앞에서 마주하게 된 은서는 그 일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 친한 친구, 담임선생님, 엄마 혹은 SNS, 심지어 누구인지도 모를 가해자의 가족에게라도. 하지만 지금까지 여성에게 가해졌던 무언의 폭력과 압박은 은서에게 비밀을 쉽사리 털어놓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학교는 성적과 진학이 우선인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겪은 일이 소문날까 봐 두렵다. 더럽다고 여길 것 같다. 현장을 피하거나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다. 어린 은서가 과하게 생각하는 걸까? 중학생이든 성인 여성이든 나이든 노년 여성이든 상관없이 성범죄의 굴레는 가해자보다 피해자에게 더 강력한 사슬이 되는 듯하다. 은서는 일요일에서부터 며칠 밤이 지난 금요일에 와서야 친구에게 자신의 비밀을 말한다. 드디어 비밀이 피해 사실이 되는 순간이다.
다시 목차 이야기를 하자. 일요일부터 다음 일요일 오전, 오후까지 이어지던 작품은 화요일에 이르러서야 날짜 앞에 수식어를 붙인다. 금요일 가까스로 비밀을 말하고, 엄마에게도 섭섭한 마음과 기대고 싶은 감정을 풀어놓은 후에야 은서에게 진짜 평범한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렇게 맞이한 ‘어느 평범한 화요일’, 은서는 친구들과 최근 발견한 유튜브 채널을 공유하고 좁쌀 여드름에 짜증을 내고 주말 홍대에 운동화를 사러 나갈 약속을 잡는다. 피해를 당하기 전이나 후나 은서에게는 똑같은 하루이지만,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다는 당연한 사실을 곁의 사람들로부터 확인받은 후의 은서는 전과는 조금 다를 수 있다. 전보다 괜찮아질 수 있다. 비로소 내 것이 아닌, 아니어야 할 죄책감과 혐오, 원망과 후회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생길 테니까. 그것이 진정한 평범함이니까. 은서와 유원에게 말하고 싶다. 너의 잘못이 아냐, 너는 잘못되지 않았어. 이 말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 말을 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한 우리가 이제까지 잘못하였다.
서효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