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를 읽고 싶을 때가 있다. 현실에서 정의와 정직, 신뢰 따위의 보편적 가치가 무너지는 걸 봤을 때다. 동화에서는 그 가치를 지킨 인물이 ‘오래오래 행복한 삶’을 보장받는다. 미리 말하지만 동화를 읽고 싶은 이유를 현실도피라고 해두자.
좋아하는 동화 중에 독일의 작가 그림 형제가 쓴 ‘빨간 모자’가 있다.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 동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작고 귀여운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할머니가 주신 빨간 벨벳 모자를 항상 쓰고 다녀 ‘빨간 모자’라 불린다. 어느 날 빨간 모자는 편찮으신 할머니에게 음식을 전해드리러 집을 나섰다가 늑대를 만난다. 빨간 모자를 잡아먹고 싶어 꾀를 낸 늑대는 지름길로 달려 할머니 집에 먼저 도착한다. 그러곤 빨간 모자 행세를 하며 집 안으로 들어가 할머니를 잡아먹는다. 늑대는 할머니의 모습으로 변장해 문을 열고 들어온 빨간 모자마저 삼킨다.
배부른 늑대는 잠이 들었고 시끄럽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마침 근처를 지나던 사냥꾼이 평소 할머니의 코 고는 소리와 다름을 느끼고 집으로 들어온다. 늑대가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걸 알아차린 사냥꾼은 가위로 자고 있는 늑대의 배를 가르고 빨간 모자와 할머니를 구한다. 사냥꾼과 빨간 모자는 무거운 돌들을 가져와 늑대의 배 안을 채운 뒤 꿰맨다. 나중에 깨어난 늑대는 뱃속에 든 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넘어져 죽는다.
개인적으로 사냥꾼이 등장한 이후의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웃이 당한 고통을 지나치지 않고 돕는 정의로운 어른을 볼 수 있어서다. 무엇보다 극악한 늑대에게 적절한 처벌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인상적인 건 빨간 모자가 사냥꾼과 함께 늑대의 뱃속에 돌을 넣은 것이다. 동화에서는 작고 힘없는 소녀라도 정의로운 어른의 도움을 받아 악행을 한 대상에게 합당한 징벌을 내릴 수 있다. 빨간 모자와 할머니, 사냥꾼은 그 이후에도 서로 도우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이제부턴 우리 현실의 이야기다. 12년 전 어느 날 모두에게 사랑받던 작고 귀여운 소녀는 잔인무도한 늑대를 만났다. 늑대의 공격에 소녀는 입에 담기도 힘든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가녀린 소녀는 공권력을 가진 어른의 도움이 필요했다. 소녀에겐 정의로워 보이는 사냥꾼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예상과 달리 늑대에겐 적절한 처벌이 가해지지 않았다. 당시 경찰은 성폭력처벌법상 강간상해 혐의를 적용해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 사건 발생 5개월 전 13세 미만 미성년자에 대한 강간상해범을 최대 무기징역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성폭력처벌법이 개정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찰은 성폭력처벌법이 아닌 형법상 강간상해 혐의로 그 늑대를 기소했다. 법정에 선 늑대는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 감경을 주장했다.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여 ‘징역 12년’이라는 약한 징벌을 내렸다. 동화 같은 결말을 기대했던 소녀의 믿음은 무너졌다.
늑대가 갇혀있는 동안 법 적용이 잘못됐다는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같은 참사가 재발하지 않도록 처벌기준을 강화하고 안전망을 구축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빨간 모자’를 보호하려는 어른들이 많이 늘어난 것 같았다. 이제 좀 동화와 맞닿은 현실이 되는 건가 기대를 하게 됐다.
얼마 전 그 늑대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정의로운 사냥꾼’을 자처한 많은 이들이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늑대를 호송하는 차량에 올라타 발을 구르거나 늑대가 숨어있는 집을 향해 욕설과 고함을 질렀다. 윗옷을 벗어 던지고는 일갈을 날리는 이도 있었다. 이 얼마나 정의로운 어른이자 사냥꾼의 모습인가.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사냥꾼들은 자신의 주머니 채우기에 바빠 보였다. 조회 수를 늘리거나 별풍선을 얻기 위해 늑대를 자극하는 것일 뿐 소녀가 당한 아픔에 진심으로 분노하는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앞서 소녀의 가족은 늑대의 귀환 소식에 정든 동네를 떠났다. 늑대에게 관대했던 공권력들은 저마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풀려난 늑대가 마주한 건 동화로 위장한 현실이다. 교활하고 이기적인 맹수가 활보하기에 용이하지만 작고 연약한 빨간 모자 소녀가 살아내기에는 잔혹한 현실 말이다. 지금은 움츠려 있는 그 늑대가 여전히 세상이 동화 같지 않음을 알아채고 기지개를 켤까 두렵다. 다시 동화가 읽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