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숭실중학교에는 매일 한 시간씩 성경 공부가 있었다. 인근 평양신학교 교수들과 평양의 유명 목회자들이 와서 설교하곤 했다. 한경직 박형룡 목사, 조만식 장로 등 학교를 찾은 교수들의 이름을 지금도 기억한다. 공부는 학교에서 했으나 정신적으로는 채플 시간 설교 말씀으로 배운 게 더 많았다.
숭실중학교에는 기숙사가 있어 각지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장로교를 대표하는 학교였기에 부산 대구 등 영남이나 평안북도에서 온 이들이 적지 않았다. 북간도 용정의 학교에서도 전학을 왔다. 기숙사 학생들은 방학 때마다 지방의 교회로 전도 여행을 떠났다.
하나님을 믿으며 민족의식을 중시한 학교의 전통은 1935년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위기를 맞았다. 조선총독부는 선교사들의 활동을 억제하고 민족주의 계열의 학교를 폐교하려 들었다. 첫 희생양이 평양의 3숭(三崇), 즉 숭실중학교 숭실전문학교 숭의여자중학교였다. 세 곳 모두 선교사가 교장인 데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해 12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신사참배 거부를 결의하자 선교사들은 학교에서 손을 떼야 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교사와 학생도 학교를 떠났다. 내가 3학년이 되던 해다.
조지 맥큔(한국명 윤산온) 교장의 고별사를 기억한다. 맥큔 교장은 학교를 떠나기 전 마지막 예배에서 자신의 저서를 전교생 500명에게 나눠줬다. ‘어떤 어려움이 생겨도 예수님께 호소하면 해결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긴 책이었다. 일제 경찰이 강당을 둘러싼 가운데 그는 오른손 주먹을 불끈 쥐고 높이 쳐들며 “두(Do·하라)!”를 7번 외쳤다. 그의 푸른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학생들은 채플 시간이 끝나자마자 교문으로 뛰어가며 “숭실학교 만세”를 외쳤다. “대한 독립 만세”를 불러야 했으나 일제 경찰 앞이라 차마 그러진 못했다.
학교가 신사참배를 받아들이자 교사와 학생들도 하나둘 교정을 떠났다. 같은 학년이었던 시인 윤동주는 용정의 모교로 돌아갔다. 나는 자퇴를 선택했다. 하지만 배움을 멈춰선 안 된다는 생각에 평양부립도서관을 학교처럼 다니며 1년간 독학했다. 이때의 고됨과 번뇌는 말로 다 하기 어렵다.
이런 내 생각을 바꾼 이들 중 한 명이 데이비드 마우리(한국명 모의리) 선교사였다. 그는 “강요에 의해 형식적으로 신사참배했다고 죄가 될 리 없다. 학업을 이어 먼 장래에 신앙인으로 항일운동을 하는 게 민족에게 더 좋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선친뿐 아니라 교회 목사와 장로도 같은 생각이었다.
4학년으로 복학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신사참배 대열에 끼게 됐다. 첫 참배 때 나는 울면서 마음속으로 “이런 비극이 사라지는 날이 오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1년 뒤 숭실중학교가 폐교되면서 일본식 공립학교인 ‘평양 제3공립중학교’로 바꼈다. 5학년 과정이었던 중학교의 마지막 1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황국신민 개조’를 목표로 군국주의 교육을 한 이 학교에서 생활은 전쟁터 같았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