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지독한 아홉수… 北 길어지는 ‘전략적 침묵’

입력 2020-12-19 04:05

집권 10년 차를 목전에 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사면초가에 몰렸다. 코로나19 장기화에다 ‘브로맨스’ 평가까지 받았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선 패배로 김 위원장을 둘러싼 국내외 환경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다. 김 위원장은 8차 노동당대회 조기 개최를 선언하며 승부수를 던졌으나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2020년 최악의 한 해

김 위원장은 2020년을 최악의 해로 기억하며 집권 10년 차인 내년을 준비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 차단을 이유로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중국과의 국경을 10개월가량 걸어잠그면서 경제난은 심화됐고, 재선을 간절히 바랐던 트럼프 대통령 역시 코로나19 방역에 실패하며 정권을 내줬다. 가용 자원을 총동원해 올 한 해를 그럭저럭 넘긴 뒤 내년 트럼프 대통령과 핵 담판에 돌입한다는 계획이 코로나19로 틀어진 것이다.

정대진 아주대 통일연구소 교수는 18일 “김 위원장으로선 경제의 기초체력이 더욱 약화된 와중에 대북 원칙론자인 조 바이든 미 대통령 당선인과 마주하게 된 상황”이라며 “고민이 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위원장도 복잡한 속내를 좀처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최근 주재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21차 정치국 확대회의에서는 경제운영 전반을 맹비난했다. 8차 당대회를 앞두고 조바심을 드러낸 것이다. 지난 10월 노동당 창건 75주년 공개연설에서는 삼중고(대북제재·코로나19·자연재해)로 인한 어려움을 토로하며 세 차례나 울먹이는 모습을 보였다. 평소라면 벌써 나왔어야 할 미국 대선 관련 논평이 한 달 넘게 없는 것도 김 위원장의 답답한 심경을 대변한다는 분석이다.

당대회 조기 개최 승부수…묘수는 ‘글쎄’

김 위원장은 이런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국정 시간표를 4개월 가까이 앞당기는 승부수를 던졌다. 내년 5월로 예정됐던 8차 당대회와 최고인민회의를 1월 열기로 전격 결정한 것이다. 내부 정비를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한 뒤 바이든 행정부와의 비핵화 협상에 집중한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하지만 현 상황을 해결할 뾰족한 해법을 내놓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가 여전히 숨통을 조이고 북·중 국경까지 닫은 상황에서 김 위원장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2016년 7차 당대회 때처럼 기존에 발표했던 정책을 이름만 바꿔 재탕·삼탕할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크다.

이상근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은 “김 위원장이 직면한 대내외 여건이 너무 나쁘다”며 “이런 상황에서 획기적인 노선을 제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올해 초 당 전원회의에서 천명한 정면돌파 노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다.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도 지난 10일 공개한 ‘한반도 정세: 2020년 평가 및 2021년 전망’ 보고서에서 자력갱생을 토대로 한 ‘정면돌파전 2.0’이 8차 당대회 때 제시될 것으로 전망했다. 연구소는 특히 김 위원장이 8차 당대회를 통해 공개하겠다고 밝힌 국가 경제발전 5개년 계획과 관련해 “기존 노선과 정책 기조를 계승하면서 미진한 부분을 보완·혁신하는 방법을 취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사진=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게티이미지뱅크

전략도발 카드… 하지만 부담스럽다

김 위원장이 평양 노동당 본부청사 집무실에 앉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또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발사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수도 있다. 경제난에 따른 내부 불만을 잠재우고 바이든 행정부의 관심을 끄는 데 무력시위만 한 게 없다는 판단에서다. 북한은 미 정권교체기마다 장거리 미사일을 쏘거나 핵실험을 하는 등 ‘고강도’ 도발을 감행하며 한반도에 긴장 국면을 조성한 전력이 있다.

그러나 빤히 보이는 수인 탓에 ‘결단’을 주저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수차례 써먹었던 수법으로 상원 외교위원장에 부통령까지 역임한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을 놀라게 하기는 어렵다. 바이든 당선인은 8년간 부통령을 지내며 세 차례의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은하 2호’ 발사 등을 경험한 바 있다. 오히려 도발이 향후 북·미 비핵화 협상에 불리하게 작용할 빌미를 주는 ‘악수’가 될 수도 있다는 점도 김 위원장으로서는 부담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가 코로나19 대응에 여념이 없는 와중에 무력시위에 나설 경우 크게 주목받기 어렵고, 그 파급효과도 제한적”이라며 “김 위원장도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군사력을 대내외에 과시하면서도 미국을 자극하지 않는 수준의 ‘저강도’ 도발을 감행할 수 있다. 국가정보원은 8차 당대회에 맞춰 열병식이 한 차례 더 열릴 수도 있다고 밝혔다. 미 본토를 사정권에 둔 신형 ICBM과 SLBM을 재차 공개해 바이든 행정부를 압박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내년 3월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계기로 북한이 초대형 방사포 발사 또는 해안포 사격을 단행할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된다.

김정은, 2021년도 어렵다

최근 코로나19 재확산은 김 위원장의 2021년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코로나19에 발목이 잡혀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이 내년에도 되풀이될 가능성이 상당하다는 뜻이다.

대북 제재 완화의 열쇠를 쥔 바이든 행정부는 코로나19 등 현안이 산적해 있어 북핵 문제는 후순위로 밀린 상황이다. 중국도 코로나19 재확산 조짐을 보이고 있어 국경 봉쇄는 한동안 더 이어질 수밖에 없다.

북한 역시 겨울로 접어들자 방역 등급을 최고 수준인 ‘초특급’으로 다시 격상했다.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이달 초부터 대중교통망이 모두 정지됐다”며 “악성 비루스(바이러스) 예방을 위해 열차와 버스 운행을 금지한 것”이라고 전했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8차 당대회에서 제시한 사업들을 관철하려면 대중 동원이 필수인데, 이마저도 코로나19로 못할 수 있는 것”이라며 “김 위원장으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봉착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손재호 기자 sayh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