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의 눈동자’는 1991년 10월부터 1992년 2월까지 MBC에서 방송됐던 36부작 드라마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서 해방을 거쳐 한국전쟁에 이르는 현대사를 파란만장한 세 남녀의 엇갈린 운명으로 장대하게 풀어낸다. 일본군 ‘위안부’, 731 생체실험 부대, 미군 OSS 부대, 제주 4.3 사건, 빨치산 등 충격적인 역사를 담은 데다, 회당 2억원의 기록적인 제작비로 만든 대작이다. 채시라, 최재성, 박상원 등 스타들의 호연에, 송지나 작가와 김종학 연출이 빚은 만듦새가 일품이었다. 최고 시청률이 58.4%에 달했는데, 철조망을 사이에 둔 애절한 키스 장면은 지금도 회자된다.
위안부 문제에 가부장제 모순 얽혀
‘여명의 눈동자’는 ‘위안부’를 다룬 첫 드라마이자 대중에게 각인시킨 작품이다(최근 국내에선 일본군이 취하려 한 ‘위안’의 허구성을 드러내기 위해 역사적 용어로서의 위안부를 ‘위안부’라고 표시한다). 1991년 8월 14일에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나온 지 두 달 만에 드라마가 시작돼 반향이 컸다. 물론 두 달 만에 드라마가 만들어진 것은 아니며, 1989년부터 기획돼 일부가 사전제작 됐다. 원작은 1975년부터 1981년까지 6년간 일간스포츠에 연재됐던 동명의 대하소설이다. 군사정권 시절 이런 소재의 소설이 연재될 수 있었을까 의아할 테지만, 소설은 드라마와 결이 달랐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묘사가 많은 데다, 인물들의 궤적이 반공 소설처럼 흘러간다. 각색이 매우 훌륭한데, 특히 제주 4.3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나 여옥을 비참한 희생자로 그리지 않은 것 등은 송지나 작가의 역량이다.
물론 원작도 분명한 의의를 지닌다. 당시 ‘위안부’ 문제는 변변한 자료 조사도 없었고 야사나 풍문처럼 여겨졌는데, 이를 신문 연재에 담아 대중에게 널리 알린 공로가 크다. 그의 소설은 1990년대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되는데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된 것은 1990년 1월 윤정옥 교수의 ‘정신대 취재기’가 한겨레신문에 연재되고, 37개 여성단체가 모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설립하면서부터다. 그전에도 ‘위안부’를 그린 작품은 있었다. 영화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1965)와 ‘여자 정신대’(1974·1985), 윤정모 소설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1982), 허문순 소설 ‘여자 정신대’(1989) 등. 그러나 ‘위안부’에 대한 관음적인 시선을 드리운 작품들도 있었고, 여전히 민족의 수치로 여기는 분위기도 있었다. 원작소설도 이런 한계를 공유하는데 비해 드라마는 한결 벗어나 있다.
여옥은 경성에서 학교에 다니다 모친상으로 고향인 남원에 내려왔다가 독립운동가 아버지의 행방을 추궁하는 경찰에 의해 ‘위안부’로 끌려간다. 중국으로 가는 호송차에서 처음으로 일본 장교에게 성폭행을 당하는데, 이는 ‘위안부’에 대한 드라마의 관점을 잘 드러낸다. 즉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민족모순에 의한 성폭행’ 즉 일본이 조선에게 가하는 성폭행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또한 드라마는 ‘공중변소’라는 언급이나 사이판에서 패배한 일본군이 증거를 없애기 위해 ‘위안부’들을 집단학살하는 장면을 통해 ‘위안부’가 완전히 물건처럼 취급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하지만 여옥은 위안소에서 만난 최대치와 사랑에 빠지고, 그의 아이를 낳기로 한다. 성폭행이 일상인 곳에서 사랑이라니,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의아할 수 있다. 드라마는 이들의 감정을 매우 애틋하게 그리며 시청자를 설득해낸다. 여옥이 “새로 갈은 깨끗한 이불”임을 강조하며, 최대치에게 사랑의 눈빛을 보내는 장면은 잊을 수 없다. 드라마는 그것이 가능한 이유로 최대치가 조선에서 끌려온 학병으로 둘이 피해자 의식을 공유하기 때문으로 그린다.
봉순과 동진도 위안소에서 만난 연인이다. 요컨대 끔찍한 성폭행이 자행되는 위안소에서 만난 군인에게 ‘위안부’가 사랑을 느낀다는 이야기는 피학적 망상으로 비난받기 쉽지만, 그 군인이 조선인이라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이는 ‘위안부’ 문제의 핵심이 민족모순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민족모순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하나코는 아버지와 기둥서방에게 착취를 당해 전선까지 흘러들어온 일본인 성매매 여성인데, 그와 여옥이 당하는 착취는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위안부’는 해방 후 같은 민족에 의해서도 고통받는다. 드라마에는 고향에 간 여옥이 마을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취급을 당하는 모습과 간첩혐의로 재판정에 선 여옥에게 검사가 ‘정신대’ 와 ‘매춘’을 운운하며 압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위안부’ 문제에 가부장제의 모순이 얽혀있음을 보여준다.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직후 방송된 드라마에서 이러한 장면들을 짚어줌으로써, 한국사회의 자성을 촉구하고 더 많은 피해자의 증언이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제주 4.3 사건을 재현하다
‘여명의 눈동자’는 제주 4.3 사건을 다룬 최초의 드라마이기도 하다. 총 36부작 중 6개 회차에 걸쳐 이 사건을 담는다. 제주 4.3 사건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공식적인 진상조사와 함께 국가적인 사과와 추념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군사정권 하에서 제주 4.3 사건은 금기로 취급됐다. 소설 ‘순이 삼촌’(1978)이 있었을 뿐, 영화나 드라마로 재현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이런 금기를 깨고 1991년에 공중파 드라마를 통해 4.3 사건이 재현된 것은 기념비적인 일이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봉기가 제주도 일대에서 일어났으며, 경찰과 극우단체의 부당한 진압으로 수만 명의 제주도민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이 드라마를 통해 알려진 것이다.
원작에서는 여옥이 한라산에 입산하지 않지만, 제주 출신의 송지나 작가는 여옥의 한라산 입산을 그린다. 또한 악역 스즈키를 변절한 공산주의자로 그렸던 원작과 달리 해방 후 득세한 친일파로 그린다. 이는 해방 후 남한 사회의 문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며, 왜 제주도민들이 남한 단독 정부수립에 반대했는지 간접적으로 일깨운다. 드라마는 자막을 통해 토벌대가 295개 마을에서 1만 가구에 불을 질렀으며, 당시 28만명의 제주 인구 중 8만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희생자들의 실명과 사진을 짚어주며 추모의 마음을 일깨운다.
엇갈린 운명
세 사람의 운명은 한민족에 대한 비유로 읽힌다. 이들은 일제에 의해 동원되어 이역만리에서 패잔병의 상태로 누구에게 발견되느냐에 따라 상반된 인생을 살아나간다. 개성 출신으로 중국 유학생이었던 최대치는 버마에서 패잔병이 된 후 중국 공산당에서 활동하는 인물에게 발견되어 팔로군이 되고, 이후 마적이 되었다가 다시 포로 상태에서 소련군에 의해 발견된다. 그는 북한의 장교가 되어 한국전쟁 때 남한으로 내려와 빨치산이 된다.
한편 일본 유학생이었던 하림은 사이판에서 패전 후 미군에게 발견되고 이후 미군에 들어간다. 그도 남북을 오가다 빨치산 토벌대가 된다. 그는 스즈키를 미워하면서도 결국 한편이 되어 최대치와 총을 겨눈다. 장하림과 최대치의 궤적은 남북한 두 체제의 탄생을 인격화한 것처럼 보인다. 즉 일제의 패전으로 무주공산이 된 한반도에서 중국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무장독립운동을 했던 세력이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한 뒤 친소 사회주의 체제를 수립하였고, 일본에 문화적 친연성을 갖던 남한의 엘리트는 미군의 강력한 영향권 아래 놓이면서 친미 자본주의 체제를 수립하면서 친일파를 수용하게 된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여옥은 가장 복잡한 생애 궤적을 그린다. 그의 인생이 꺾이는 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와 남편이라는 사적 관계이다. ‘위안부’로 끌려가고 미군의 첩보원이 된 것은 아버지를 위한 마음 때문이었다. 북한을 위한 스파이 노릇을 하고 마지막에 지리산에서 총에 맞는 것은 최대치를 향한 사랑 때문이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수많은 기회와 변곡점을 맞지만 최대치 때문에 질곡에 빠진다. 물론 원작에서 여옥이 끊임없이 짓밟히는 삶을 살다가 최대치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에 비하면 진일보한 각색이지만, 여옥이 최대치와의 관계에 묶인 채 자신의 가능성을 펴지 못하는 것은 아쉽다.
사실 여옥은 대단히 미스터리한 존재이다. ‘위안부’부터 미군첩보원, 사형수 등이 되어 형언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겪지만 언제나 망가지지 않은 채 고결함을 지닌다. 전쟁 통에 자식을 잃은 여옥이 다른 전쟁고아들을 돌보며 지리산 마을에 살다가 부상당한 최대치에게 약을 구해주려다 죽는 모습은 숭고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현실의 여성에 대한 묘사로 보긴 힘들다. 오히려 남성의 이상이 구현된 존재가 아닐까. 어떤 풍파를 겪더라도 순정과 헌신과 생명력을 간직한 존재라니, 여자는 사람이 아닌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