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000명이 넘은 코로나19 확진자 숫자 탓에 마음이 심란하다. 어디에서, 언제 감염되더라도 이제는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며칠 전만 해도 방역 성과 자랑에 여념 없던 정부가 어이없다는 느낌이다. 몇 걸음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단견이 놀라울 뿐이다.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면 외출할 일을 없애고 만남과 모임을 모두 취소했다. 병상마저 부족하다고 하니 이제는 각자 더욱더 조심해서 병들지 않고 살아남는 수밖에 없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에 현재의 우리 상태를 예견한 듯한 구절이 나온다. “당국은 페스트에 관해 더할 수 없이 교묘한 속임수를 쓰고 있다. 그들은 130이 910에 비해서 훨씬 적은 수라는 점에서 페스트를 몇 점 앞지른 것이라고 상상하는 모양이다.” 이 작품에 따르면 권력이 숫자 놀음을 통해 사태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낮추려 한 것이 이 병의 첫 고비였다. 92명이든 107명이든 120명이든 사태의 심각성이 바뀌진 않는다. 사망자가 910명에서 130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페스트가 사라진 게 아니다.
숫자 놀음이나 언어 조작으로는 감염병을 조금도 막을 수 없다. 경제 상황 등을 고려했겠으나 ‘2단계+α’니 어쩌니 하면서 말로 하늘을 가리고 쿠폰을 풀어 소비 진작에 나섰을 때 방역은 무너졌다. 시민들 마음에 있던 자물쇠도 함께 풀렸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1, 2, 3단계는 의료적 방역이지만 1.5단계, 2단계+α 단계, 2.5단계는 정치적 방역에 불과했다. 의료 전문가들이 감염의 폭주를 경고했으나 정치와 경제의 논리가 의학의 논리를 압도한 셈이다. ‘사람이 먼저’가 아니라 ‘돈이 먼저’였던 것이다. 모두를 감동시킨 첫 마음을 잃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명제를 품고 살아가려 애쓴다. 이룩해야 할 이상, 도달해야 할 목표, 남기고 싶은 의미를 한 줄로 집약해 마음의 문패로, 행동의 나침반으로 삼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좀처럼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현실이 어느새 첫 마음을 무너뜨리기 십상이다. 새해의 굳은 다짐이 연말의 후회로 남은 일은 얼마나 잦은가. 청년의 이상이 중년의 야비함과 노년의 비루함으로 전락하는 일은 얼마나 흔한가.
‘창세기’에 따르면 신이 인간에게 건넨 첫마디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이다. 이 말을 나는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생명을 먼저 생각하라는 뜻으로 읽는다. 아이를 낳아서 튼실히 기르고, 번성해 온 땅에 퍼져 나가려면, 아이가 맞아 죽거나, 가난한 자가 굶어죽거나, 살려고 일하러 간 사람이 돈 때문에 죽으면 안 된다. 사람의 생명보다 돈이 우선인 세상에서만 이러한 일은 일어난다. 끔찍한 일이다.
신이 인간에게 건넨 두 번째 말도 생명에 대한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지식의 열매’를 따 먹은 후 죽음을 대가로 받는다. 인간의 지식은 유한성, 즉 죽음의 산물이다. 인간이 죽음의 고통 속에서 간신히 지식을 얻는다. 거꾸로 말하면 자기의 작은 지식을 바탕으로 함부로 생명의 무게를 재는 인간 행위는 언제나 죽음을 부른다. 우리는 현재 그 결과를 보고 있다. 생명보다 돈을 계속해서 우선하면 현재 하루 수백명의 환자는 자칫 수백명의 사망자로 변할 수 있다. 무서운 일이다.
신이 인간에게 건넨 세 번째 말은 질문이다. “네가 어디 있느냐.” 나는 이 말을 사태가 잘못돼 간다고 생각하면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처지인지부터 살피라는 뜻으로 읽는다. 인간은 자기 확신 속에서는 무한정 잘못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꺾어질 경제를 염려하고 성장률을 걱정하는 사이에 사람들이 죽어 간다. 행동을 멈추고 질문 앞에 설 때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돈의 자리가 아니라 생명의 자리여야 마땅하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