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근 목사의 묵상 일침]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라

입력 2020-12-16 03:01

구약성경 출애굽기 3장에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 이야기가 소개된다. 이야기 시작에는 모세의 움직임이 흥미롭게 묘사돼 있다.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1절) 서쪽 하나님의 산으로 향하는 모세의 움직임은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을 떠난 인류가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난 사실을 상기시키는 그림이다.

동쪽으로 쫓겨나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인류가 맞이한 첫 사건은 형제간의 살인이었다. 아우의 흘린 피가 땅에서 호소하였지만, 그의 형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하고 외면했다. 이후 이웃과 형제의 고통에 대한 외면은 타락한 인류의 전형적인 특징이 되었다. 애굽은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하면서 그들의 절규에 귀를 닫았다. 노예들의 피와 땀으로 유지되는 제국에서는 존엄한 하나님의 형상은 온데간데없고, 힘과 물질의 지배 아래서 신음하는 노예들만 남게 되었다.

이제 모세는 ‘서쪽’으로 향하여 하나님의 산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으로부터 동쪽으로 쫓겨났던 인류에게 회복과 구원의 서막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은 하나님께서 신음하고 있는 하나님 형상들의 호소를 들으셨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출 3:7) 하나님은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보고 듣고 알고 계셨다.

자기 백성의 절규를 들으신 하나님은 이제 세상에 내려가 그들을 건져 내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시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모세를 향해 ‘이제 가라!’고 말씀하시면서 그와 항상 함께하시겠다 약속하신다.

그러나 모세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내가 누구이기에?”라며 반문한다. 이러한 반응은 사실 겸손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아직도 힘이 지배하는 애굽의 가치관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가 젊어서 힘과 능력이 있을 때는 스스로 자기 민족을 구원해보고자 하였었다. 그러나 40년의 야인(野人) 생활을 통해, 젊음도 힘도 잃어버리자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어떠한가. 애굽과 바벨론, 로마제국의 정신인 ‘더 크게, 더 많이, 더 높이’라는 힘의 논리가 현대 교회의 의식 속에 스며들어 있지 않다고 부인하기 어렵다. 세상은 더 많이 모으고, 가진 것을 지키는 싸움을 하고 있다. 슬픈 사실은 교회 또한 이런 가치관에 붙들려 있다는 것이다. 마치 교회가 재력과 권세와 명성을 가져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착각하며 거기에 몰두하는 싸움을 하고 있지 않은지 우리는 자문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결코 자기 실력과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러했다면 하나님은 제국들의 힘과 권세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토록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감당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하며 너를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는 이유다. 모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하나님과 같은 심정으로 백성들의 호소에 귀 기울이며 마음을 그들에게 향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하나님의 형상들을 백성으로 되찾기를 원하신다. 허무한 세상 속에서 울부짖는 자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안식을 경험하도록 인도하길 원하신다. 이스라엘 노예들을 건지기 위해 모세를 부르셨던 하나님은 이제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웃의 신음에 귀 기울이고 그 호소에 응답하기를 기대하신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더 많이 모이냐’가 아니라 ‘더 많이 흩어지느냐’로, ‘더 많이 모으느냐’가 아니라 ‘더 많이 나누느냐’로 전환해야 한다. 이제는 진정으로 교회가 신음하는 이웃들을 향해 가슴과 손을 열어야 할 때다.

(삼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