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으로 깨달음을 얻고 삶에 변화가 생긴 건 중학교에 입학한 열네 살 때다. 6남매의 장남이긴 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렵고 건강에도 자신이 없어 중학교 진학을 염두에 두지 못했다. 내가 살던 송산리의 신망학교는 4학년 과정밖에 없어 5학년부터는 10리쯤 떨어진 칠골의 창덕학교를 다녔다. 창덕학교에서 만난 윤태영 선생님은 없는 재산을 부풀려 써주고, 내 건강에도 좋은 평가를 해 주며 중학교 진학을 도와주셨다. 나를 꼭 중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선친께도 강력히 권했다.
당시 평양에는 여러 중학교가 있었지만, 장로교회를 다닌 나는 숭실중학교를 유일한 중학교로 여겼다. 중학교 신입생을 대상으로 신체검사가 있었는데, 평양의 근대식 병원인 기홀병원 의사들이 찾아와 검진했다. 한 의사가 내게 “아픈 곳은 없느냐”고 물었다. 의사는 영양부족으로 뼈만 앙상해 보이는 내 모습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아픈 곳이 없다”는 내 대답에 그대로 통과시켰다. 신기하게도 그 뒤부터 내 건강에 이상이 없어졌다.
중학생이 되고 나니 느낌과 생각의 차원이 달라지는 걸 느꼈다. 이제 어른이 된다고 느꼈다. 또래와 달리 뜻이 있어 중학교에 왔다는 자부심도 들었다. 운명 같은 무언가가 나를 기다린다는 예감 같은 것이었다. 나는 내 인생을 준비해야 하고 누군가 나를 불러줄 때가 왔다는 절박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인생을 바꿀 만남도 이때 찾아왔다. 숭실중은 당시 3학기제였는데 1학년 3학기때 같은 캠퍼스를 쓰는 숭실전문학교 5층 소강당에서 학생을 위한 신앙부흥회가 열렸다. 일주일 동안 저녁 시간에 집회를 한다는 소식에 나는 시골 통학을 중단하고 시내의 작은할머니댁에 묵으며 전일 참석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강사는 장로교를 대표하는 윤인구 목사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었던 감리교의 김창준 목사였다. 특히 영국 에든버러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막 돌아온 윤 목사의 설교에 감명을 받았다. 지금도 그 설교 제목과 내용을 기억한다. 그 아늑하고 엄숙했던 부흥회 분위기는 성경에 나오는 잔칫집을 연상시켰다. 많은 젊은이가 영혼의 양식을 얻고 돌아갔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부흥회를 마치면서 내 생각과 행실에도 큰 변화가 왔다. 병아리가 껍데기를 깨고 밖으로 나온 것 같았다. 내 삶의 새로운 이정표가 생겼다. 희망을 품고 그 길을 달려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나는 신앙적 의욕을 채우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기도는 이러한 노력의 하나였다. 집과 예배당은 물론 이른 새벽 산에 올라가 기도했다. 어떤 상황이 닥치든 먼저 기도하는 습관도 익혔다. 이때 한 기도 중 하나가 “이제부터 나를 위함이 아닌 하나님과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살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리스도를 택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를 택하셨다는 신념이었다. 기회가 허락되는 대로 교회 부흥회에 가 여러 목회자의 설교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