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낙원동 낙원상가를 마주하고 오른쪽 길로 들어가면 한옥 카페 골목이다. 두 사람이 어깨를 틀어야 지나갈 수 있는 그 한옥 카페 골목에 특별한 간판이 눈에 띈다. ‘이문학회’이다. 20세기 최고의 한학자로 불리는 노촌 이구영(1920~2007)의 서당이다.
노촌은 충북 제천 양반가 출신으로 의병장 이주승을 아버지로 두었다. 그는 벽초 홍명희를 사사하고 경성영창학교(YMCA학교 후신)와 연희전문학교에서 공부했다. 연희전문에서 정인보를 사사했다. 일제 말 노촌은 합천독서회 사건 등으로 갇히는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살았다. 그는 6·25전쟁 때 월북했고 김일성 앞에서 실학 강의도 했다. 그리고 1958년 남파간첩으로 내려와 두 달 만에 체포돼 비전향 장기수가 됐다. 이때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들어온 신영복(1941~2016·전 성공회대 교수)을 만났다. 신영복은 감옥에서 노촌을 사사한다. 1980년 5월 전향서를 쓰고 출옥 후 노촌은 1984년 이문학회를 설립했다. 쟁쟁한 한학자와 고전 공부 후학들이 지금도 여기서 배출된다. 노촌의 삶은 한국현대사의 압축파일로 불린다.
“내 평생 신앙이라곤 가져본 일이 없다.” 이 무신론자에게 천국의 기쁨을 전한 이가 있었다. 노촌은 그 전도자를 이렇게 설명한다.
“자신을 위해서는 과일 하나 사는 것도 주저하는 사람이 형무소 수인을 위해 매달 돈을 보내고 겨울이 되면 털양말을 차입하기 위해 동대문시장을 찾아 헤맨다. 주위에서 아무리 성화를 대도 생활의 고단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눔의 철학을 실천한다. …그는 기도회가 있을 때마다 나를 인도하려고 무진 애를 쓴다. …나의 무반응에도 불구하고 나를 좋은 곳으로 인도하려는 그의 노력은 그칠 줄 모른다.”
‘그’는 기독신여성 백란영 권사이다. 천국과 부활을 소망하고 한 평생 자유주의자로 살아온 백란영은 신앙, 사상, 이념의 충돌 전선에서 ‘주님의 뜻’을 좆은 지혜의 여인이었다. 그 두 사람의 박애 정신은 같았으나 해석이 달랐다. 그들은 낙원을 꿈꿨다. 다만 ‘에덴’과 ‘파라다이스’라는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사람의 본디를 알고자 했다.
백란영은 근대의학의 선구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백인제(1899~1950?·백병원 설립자) 박사의 장녀다. 또 근대연출가 이서향(1914~1969)의 부인이다. 백인제는 1950년 납북돼 소식을 모른다. 이서향은 일본 유학파 출신 연극연출가였으나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아내와 자식을 두고 월북했다. 백란영은 이흥렬 곡 ‘바우고개’ 작사가가 남편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밝히기도 했다. “월북한 남편이 14세에 쓴 시였으나 이를 밝히면 금지곡이 되기 때문에 드러내지 못했다”고 했다. 이흥렬은 이서향의 친구였다. 유명 음악가 이호섭이 백란영의 시동생이다.
신혼의 남편은 연극을 통한 사상운동에 바빴다. 1948년 월북했고 서울 점령 후 남한 극장 지배인이 돼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남편의 첫 마디.
“지금도 성경 읽고 그러오?”
“물론이죠. 성경은 진리의 말씀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아버지니까 믿을 수밖에요.” 남편이 더는 말이 없었다.
이서향은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고 허겁지겁 쫓겨갔다. “아들을 안아보지도 않고 떠난 매정한 아버지였지만 정을 주지 않으려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라고 ‘이문회우’지에 회고했었다. 그렇게 남편이 떠나고 백란영은 부역자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시인 노천명도 부역 혐의로 같은 감방 안에 투옥됐다. 출옥 후 백란영은 평생 수절했다.
백란영은 오산학교 출신인 아버지로부터 기독교 영향을 받고 자랐다. 그러나 부모의 이혼으로 늘 사랑에 목말라했다. 어머니 이씨는 연단 속에서 신앙이 깊어졌고 그 어머니의 영향으로 ‘죽으나 사나’ 전도인의 자세로 살았다. 백란영은 서울 장충교회 권사였다. 제천 로뎀청소년학교(강화 국제기능인선교학교 후신) 등 학교 밖 아이들이 백란영과 장충교회 안나여선교회 헌신을 기반으로 자랐다. 소탈한 백란영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옆에 앉은 사람을 전도했다. 그의 전도를 받은 사람들이 친어머니, 친할머니처럼 따랐다.
백란영은 경기고녀와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 그의 영적 아버지는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1889~1970·독립운동가)였다. 스코필드가 노구에도 한국인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보고 왜 편히 사시지 않느냐고 물었다. “내가 죽어 하늘나라 가면 ‘어찌 너만 편히 살다 왔느냐’ 하실 것 같아 한국 사람들과 살고 있지”라고 답했다. 백란영은 숙명여고 교사 시절 노벨문학상 수상자 펄 벅의 통역을 맡기도 했다.
노촌과는 어머니 때문에 이어져 남매처럼 살았다. 부모 없는 아이를 거둔 어머니가 해방 후 미군이 설립한 제천 보육시설에서 키웠는데 이때 장사를 하며 노촌 집안과 연을 맺은 것이다. 어느 날 백란영은 ‘남자 사람 친구’ 노촌을 북한산성의 손양원 목사(순교자) 집회에 참석시켰다. 일주일 철야기도였다. 노촌의 회고. “…구원받으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설교와 기도는 내게 낯설었고…졸다 깨다를 반복했다. 백 선생은 어이없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백 선생의 끝 없는 신뢰에 가장 큰 빚을 진 사람이 나였다…기회 있을 때마다 나를 인도하려고 무진 애를 쓰셨다.” 서로가 단 한 번의 실례가 없었다.
백란영은 누구에게나 근심을 넘어선 얼굴이었다. 갇힌 자와 가난한 자를 위해 살면서도 자기 의지할 것은 조금도 챙기지 않았다. 김해 인제대(백병원 관련) 생활관 방 한 칸이 마지막 거처였다. 두 사람이 만날 때면 백란영은 예의 ‘하나님의 은총’을 얘기했다.
“무던히 속 좋은 백 선생에게 나도 모르게 ‘백 선생 같은 분이 살아 있는 부처요’라고 말한 적 있다. 백 선생이 독실한 그리스도인임을 알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선한 사람에게 옛날 어른들이 쓰던 표현을 빌린 것이다.” 노촌은 백란영을 ‘성모 마리아’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글·사진=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한국기독역사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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