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다. 이 시기가 되면 겨울바람보다 몇 배 더 차갑게 우리의 마음까지 얼려버렸던 시린 기억이 떠오른다. 1997년 겨울, 온 국민은 경제 위기와 구조조정이라는 매서운 한파에 맞닥뜨렸다. 나라 살림은 거덜났다. 정상으로 되돌리고 일으켜 세우려면 국가신인도 제고가 절실했다. ‘대한민국은 아직 건강하고, 금세 떨치고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 그 당시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 갈구해야 했던 것은 ‘신뢰’였다.
2020년 12월,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은 전 세계를 다시 혹독한 고통에 들게 하고 있다. 신보호주의와 양극화는 국제사회에 빠르게 확산되는 또 다른 바이러스다. 위드(with) 코로나 시대, 대한민국과 세계는 새로운 신뢰를 요구받고 있다.
오는 17일 대한민국 국회에서는 ‘2020 믹타 국회의장회의’가 열린다. ‘믹타(MIKTA)’는 대한민국, 멕시코, 인도네시아, 터키, 호주 5개 국가가 2013년에 결성한 중견국 협의체로, 각 나라의 머리글자를 딴 이름이다. 믹타 국회의장회의는 회원국이 1년마다 교대로 의장국 역할을 수행한다. 올해는 2015년 제1차 회의에 이어 우리나라가 다시 의장국을 맡았다.
다섯 국가를 하나로 묶는 고리는 ‘중견국’이다. 국내총생산(GDP)이나 인구 규모는 각기 다르지만 각 대륙과 지역을 대표하는 중견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중간(中間)은 연결고리다. 다자주의의 위기 시대엔 패권경쟁에만 매몰된 소수 강대국의 이기주의를 경계하고, 국가 간 불평등 해소와 공동 번영을 이야기하는 존재가 소중하다. 약소국은 여력이 부족하다. 중견국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무대다.
제6회를 맞는 2020 믹타 국회의장회의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회의장들은 ‘팬데믹 시대의 복합도전과 의회 리더십’에 대해 논의한다. 지구촌은 그동안 쌓아올린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상호 이해와 연대보다는 자국 우선주의로 눈앞의 안전과 이익에 몰두하고 만다. 코로나19 사태가 가져온 공포와 단절, 양극화와 빈곤, 기아 문제, 기후변화, 이민자 문제들을 외면하고 있다. 백신 물량은 일부 선진국이 입도선매하고 있다. 복합도전이다. 국제사회의 이성과 신뢰 회복이 절실한 때에 5개 중견국이 만난다.
각국 의장들은 복합도전 극복을 위한 공동 연대를 강조하고 포용적 성장, 민주주의 확산, 평화와 번영 등 공공이익을 위한 협력을 제안할 예정이다. 실업·빈곤·고령화 등으로 팬데믹 시대에 더욱 고통받는 약자를 배려하기 위한 의회 차원의 노력도 공유한다. 국제사회에 불어닥친 규범과 신뢰의 위기를 회복하는 다자 간 협력 기제의 의의를 비대면 화상회의 방식이 가로막을 순 없다.
이번 회의는 국제사회 신뢰 복원이라는 요청에 부응할 기회다. 강대국 간 대립의 완충 역할을 하는 중견국 협의체로서의 믹타 국회의장회의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더욱 소중한 다자주의 전화위복의 모델이 될 수 있다. 회의체 창설을 주도한 대한민국과 우리 국회의 리더십을 증명하는 계기다. 2015년 성명서에서 밝힌 한반도 평화통일과 비핵화가 세계의 공동 번영을 위한 핵심이라는 인식을 다시 공유할 수 있는 것은 개최국이 갖는 덤이다.
전 세계가 전대미문의 위기와 고통을 겪었던 한 해를 넘기며 분위기 반등이 필요한 시점이다. 20년 전 경제 위기 때의 경험처럼 ‘지구촌은 코로나 위기를 떨치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신뢰의 씨앗을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 심을 때다. 마침 성공 경험을 가진 대한민국에서 열린다. 상서로운 조짐이다. 새해를 보름 앞두고 열리는 2020 믹타 국회의장회의는 새봄을 예고하는 서막(序幕)이 될 수 있다.
김영춘 국회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