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어두운 면’을 말하지 않는 정치

입력 2020-12-14 04:03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0일 “탄소중립과 경제 성장, 삶의 질 향상을 동시에 달성하겠다”며 ‘2050년 탄소중립 비전’을 선언했다. 문 대통령은 13일 파리협정 체결 5주년을 기념해 열린 기후목표 정상회의 연설에선 “2030년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조속히 상향해 제출하도록 노력하겠다”고도 했다.

대통령 말대로 탄소중립과 경제 성장, 삶의 질 향상을 동시에 이룰 길이 있다면 좋겠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절대 쉽지 않다고 한다. 탄소 배출을 0으로 만들려면, 그동안 한국 경제의 성장을 이끌어왔던 제철을 비롯해 반도체 자동차 석유 화학 등 주요 산업 분야의 대대적 개편이 불가피하다. 태양광이나 풍력을 이용해 전기를 생산하는 데 드는 발전원가가 석탄 석유 등 기존 연료의 에너지 발전원가와 같아지는 ‘그리드 패리티’까지도 꽤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마땅한 신성장 동력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기존 산업의 재편과 달라지는 일자리를 둘러싼 세대·계층 간 갈등까지 불거질 텐데.

더구나 코로나19를 거치면서, 기후위기가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는 등 소비 행위를 바꾸는 수준에서 끝날 일이 아님을 온몸으로 깨닫고 있다. ‘2050 거주불능 지구’의 저자 데이비드 월러스 웰스는 “지구온난화가 초래하는 참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삶이 증진될 것’이라는 태평한 인식을 뒤흔들 만큼 충분히 끔찍할 것”이라고 했다. “현시점에서는 우리 후손 세대가 훨씬 부유하고 평화로웠던 오늘날의 세상을 뒤로한 채 평생 폐허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와 함께 내놓은 전망이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석학이 코로나19와 기후위기 앞에서 지금까지 인류가 누려온 풍족한 생활 방식을 대대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인간 욕망을 위해 자연을 희생시켰던 개발 방식은 물론, 과잉 생산과 소비를 통해 이뤄온 자본주의 성장 신화에도 물음표를 제기한다. 지난 9월 문 대통령이 추천한 책 ‘코로나 사피엔스’에도 나오는 얘기다.

문 대통령은 비전 선포를 하면서 구체적인 방법론 제시나 질의응답 시간은 갖지 않았다. 희망 섞인 비전 선포를 듣는 내내 기후위기의 현실과 앞으로 펼쳐나갈 정책이 내포한 ‘어두운 면’은 찾아볼 수 없었다. 탄소중립을 향한 대통령의 진정성을 의심하진 않는다. 하지만 진정성에도 분명 ‘어두운 면’이 존재한다는 통찰을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이라는 책에서 본 적이 있다. 저자 앤드루 포터는 “진정성 추구는 전체적으로 봤을 때 우리가 피하려는 특정의 몇몇 문제들이 생겨나는 데에 오히려 기여하는 역설을 초래한다”며 유권자들이 진정성 있는 정치인을 원할수록 역설적으로 정치인들이 본질보다 진정성 있게 보이려는 이미지 연출에 더 매진하는 현상을 꼬집었다.

그날 비전 선언을 중계했던 ‘흑백 화면’과 ‘폐플라스틱’으로 만든 넥타이 같은 것보다 대통령이 우리가 구체적으로 마주해야 할 현실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했더라면 어땠을까. 문 대통령은 “앞으로 국민이 일상에서 자발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시나리오나 사회 부문별로 체계적인 로드맵을 만들겠다”고 했다. 문 대통령과 여당이 앞세우는 ‘그린 뉴딜’과 ‘탄소중립 2050’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우리 사회가 지급할 비용과 감내해야 할 희생에 대한 구체적 논의와 설득 과정을 곧바로 시작해 주면 좋겠다.

코로나가 덮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알고 있다. ‘좋기만 한’ 정책이나 비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지금보다 못한 미래를 마주해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음을 말이다. 이런 어두운 면을 말하지 않은 채 장밋빛 희망만 늘어놓는 것, 어쩌면 정치의 직무유기일지 모른다.

김나래 정치부 차장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