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커튼 뒤로 최소 여덟 쌍의 두려움과 간절함이 뒤섞인 눈동자를 느꼈다. 현관문 앞 포치에는 서른다섯 살이 채 안 돼 보이는 마른 남자가 앉아 있었다. 틀림없이 그 집의 가장이었다. 제대로 먹이지 않은 사나운 개 여러 마리가 줄에 묶인 채, 황량한 앞마당에 널린 헌 가구를 지키고 있었다.”
‘힐빌리의 노래’가 주목받고 있다. 2017년 출간됐던 책이 최근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J D 밴스라는 미국 러스트벨트 출신 저자가 명문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하는 과정이 담겼다. 얼핏 보면 뻔한 가난 극복 이야기다. 하지만 책은 한 사람의 인생 서사를 통해 미국 사회의 중심과 주변을 낱낱이 들추고 있다.
힐빌리는 가난하고 소외된 백인 하층민을 말한다. 주인공은 육아에 관심 없는 부모와 대학 진학이 무엇인지 모르는 친척들, 정부 보조금 수급자와 마약 과다 복용 사망자가 들끓는 오하이오 한 동네에서 자랐다. 그는 말한다. “통계적으로 나 같은 아이들의 미래는 비참하다.”
미국은 세계 최고의 부자 나라다. 그러나 주변부는 가려져 있다. 미국의 북부 러스트벨트 등은 과거 제조업 발달의 수혜 지역이었다. 하지만 제조업 쇠퇴와 글로벌화로 지역 공장은 중국 멕시코 등으로 떠나기 시작했다. 금융, 정보기술(IT) 발전은 경제 성장의 수혜를 미국 양쪽 해변으로 옮겼다. 중간 지역은 인구와 산업이 실종된다. 텅 빈 동네의 삶은 황폐함 그 자체가 된다.
힐빌리의 노래는 민낯을 보여준다. 갑자기 삶의 기반이 없어진 사람들은 가난을 탈출하지 못한다. 더 큰 문제는 무력감이다. 직업이 없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국가가 주는 돈으로 사는 수급 인생과 마약 중독의 삶을 전전한다. 주인공은 “경제가 무너지면 실제 사람들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나쁜 상황에서 최악의 방식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라고 설명한다.
책 내용이 소설이 아니라는 것은 현실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미국 선거를 계기로 감춰둔 이면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2016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뒤에는 힐빌리의 노래가 있었다. 왜 나의 삶이 무너져 내리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트럼프 대통령은 너무 단순하고 명쾌하게 “중국 탓이다, 이민자 탓이다”라고 답을 했다. 시골, 소도시를 중심으로 지지 대상이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바뀌었다. 미국의 양쪽 해변은 파란색(민주당), 가운데는 빨간색(공화당)인 이유다.
올해 조 바이든이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됐지만 추세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젊은이·대도시와 고령층·소도시의 간극이 더 벌어졌다. 도시 세력이 시골의 힘을 눌렀을 뿐이다. 언제든 다시 뒤집혀 제2의 트럼프가 나올 수 있다. 미국은 각 주의 독립성이 강하다. 작은 국가로 불릴 정도로 지역 경제 변화가 개인의 삶에 주는 영향이 지대하다. 힐빌리의 노래가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외면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나라에도 주변부 삶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큰 경제 구조의 변화 앞에서 개인의 처지는 매우 사소하다. 내가 종사하던 산업이 쇠퇴하고, 장사하던 업종이 망하고, 동네 발전이 뒤처지는 상황 등은 시대의 흐름 앞에서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현대 사회는 성장 과정에서의 탈락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희생은 당연하다고 학습한다. 누구도 이유와 구제 방안을 얘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힐빌리의 노래와 미국 대선은 침묵 속 상처가 생각보다 깊다고 알려준다.
그리고 누군가 그 억울함을 톡 건드렸을 때 극단적 울분감이 튀어 오른다. 우리나라에도 고령층, 소도시, 탈락 계층 등을 중심으로 격한 감정들이 갈수록 집단화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을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우연히 당선된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도 언제든 응축된 분노가 왜곡돼 터져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전슬기 경제부 기자 sgj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