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햅쌀

입력 2020-12-14 04:03

선물 상자가 도착했다. 보내준 분의 정성을 확인하려고 포장을 하나씩 벗겼다. 종이 상자 속에 든 또 다른 부대. 주둥이를 고무줄로 꽁꽁 동여매 놓았다. 하얀 햅쌀. 귀한 먹을거리를 보내준 분을 생각하니 가슴이 멘다. 서울에서 함께 지낸 지인께서 전남 순천으로 이주해 올해 처음 추수한 쌀이라고 했다. 그분으로서는 이 햅쌀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결과물이겠는가. 수확의 기쁨을 누군가와 함께 누리고 싶었는데 그 대상이 친구였다. 받은 분이 다시 내게 나누어 주다니. 앉아서 사랑을 곱으로 받은 것 같고 선택된 사람이라는 뜻이어서 진한 감동이 살아나는 것 같다.

손수 모내기를 하고 한 해 여름을 벼논에서 보냈을 농부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장마에는 논배미에 물이 찰까 안절부절못했고 바람 불면 쓰러질까 마음 졸였을 게다. 그렇게 여름을 보내고 풍요로운 가을에 낫질을 하는 농부의 손이야말로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승리의 월계관이라도 씌워 주고 싶다. 그의 건강한 미소 앞에 우리도 덩달아 신이 난다.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웃는 그의 얼굴을 생각하니 우리의 마음 또한 건강해지는 것 같다.

쌀은 곧 살이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은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양식이다. 굶주린 자와 먹을거리를 나누는 마음이 가장 거룩하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쌀을 선물하는 그 마음이야말로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가. 보내는 이의 마음이 알알이 맺혀 있기에 햅쌀의 찰진 맛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때늦은 저녁상을 마주하고 쌀밥과 잘 어울리는 김치 한 조각을 곁들인다. 우리는 매일 식사를 반복하면서 이 곡식을 가꾼 농부들에게 습관적으로 감사하고 있지는 않는지. 먹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축복이다. 그래서 내 입에 음식이 들어갈 때마다 이웃에 굶주리는 사람이 없는지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하늘의 뜻이기 때문이다.

오병훈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