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클라라는 대부인 마법사 드로셀마이어로부터 호두까기 인형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는다. 한밤중에 쥐 떼가 등장하지만 호두까기 인형이 결투 끝에 물리친다. 클라라는 근사한 왕자로 변한 인형과 함께 환상의 나라를 여행한 뒤 꿈에서 깨어난다.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한 발레 ‘호두까기 인형’ 이야기다.
발레 ‘호두까기 인형’은 독일 작가 E.T.A 호프만의 소설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왕’을 원작으로 한다. 러시아 작곡가 표트르 차이콥스키가 작곡을 했는데, ‘잠자는 숲속의 미녀’ ‘백조의 호수’와 함께 그의 3대 발레곡으로 꼽힌다. 지금이야 크리스마스 시즌 스테디셀러지만, 1892년 초연 당시에는 혹평에 시달렸다.
안무를 맡았던 러시아 황실극장 발레마스터 마리우스 프티파가 공연을 앞두고 병이 나는 바람에 조수인 레프 이바노프가 급히 안무를 이어받는 등 준비가 매끄럽지 않았던 탓이 크다. 또 마임 위주의 1막과 춤 위주의 2막 사이 불균형과 함께 아이들이 많이 등장한 것도 발레 애호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후대 안무가들이 잇따라 재안무에 도전하면서 ‘호두까기 인형’은 인기 있는 레퍼토리가 됐다.
그런데, ‘호두까기 인형’도 올 1년 내내 공연계를 괴롭히던 코로나19를 피해갈 수 없었다. 올 겨울 극장에서 관객을 상대로 ‘호두까기 인형’ 라이브 공연을 올리는 나라는 일본, 영국, 러시아 등 손에 꼽을 정도다. 이마저도 예년에 비해 공연 단체나 횟수에서 대폭 감소했으며 중간 휴식시간 없이 짧게 진행되는 축약 버전을 올리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선 국립발레단이 지난 11일 공연 취소를 발표했다. 다만 유니버설발레단은 현재로선 거리두기 좌석제를 적용해 공연을 올릴 예정이다.
한국에서 ‘호두까기 인형’은 1974년 초연됐지만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이 크리스마스 시즌에 경쟁하듯 공연을 올린 건 1986년부터다. 두 발레단은 각각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과 마린스키 발레단 예술감독이었던 유리 그리고로비치와 올레그 비노그라프 버전을 채택하고 있다. 그리고로비치 버전의 국립발레단이 세련된 안무에 화려하고 격정적인 무대를 꾸민다면 비노그라프 버전의 유니버설발레단은 연극성이 짙고 한결 동화 같다.
최근 코로나19 상황 악화로 두 발레단은 고민에 빠졌다. 국립발레단은 당초 두 좌석 비우고 한 좌석 앉는 퐁당당 좌석제를 적용해 전체 좌석의 30%라도 채울 예정이었다. 수도권 국공립 예술단체의 휴관 기관은 18일까지라 19~27일 예술의전당 공연 일정과 겹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두까기 인형’을 공동주최하는 예술의전당이 연말까지 모든 기획 공연 취소를 결정하면서 내년을 기약하게 됐다. 앞서 3~5일 성남과 14~15일 대구 공연도 취소됐다. 유니버설발레단은 18~3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올릴 예정이다. 하지만 18일까지 세종문화회관이 문을 닫아야 하고, 퐁당당 좌석제 적용 때문에 기존 예매를 취소하고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
‘호두까기 인형’이 국민적인 작품으로 통하는 미국 발레단들의 상황은 더욱 좋지 않다. 극심한 코로나19 확산세에 일찌감치 대면 공연을 포기하고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대체했다.
원래 ‘호두까기 인형’이 인기 레퍼토리가 된 것은 1954년 미국 뉴욕시티발레단에서 조지 발란신 안무로 공연하면서부터다. 러시아 초연과 달리 아이들을 많이 등장시키며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발레’로 브랜딩 한 것이 주효했다. 이후 미국 방송사가 공연을 방영하면서 대중적인 작품으로 인지도가 껑충 뛰었다. 그리고 전 세계 발레단이 앞다퉈 ‘호두까기 인형’을 레퍼토리화 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공공 지원이 적고 후원과 티켓 판매에 의존하는 미국에서는 발레단들의 연간 전체 수입 가운데 40%가 ‘호두까기 인형’에서 나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1년 내내 적자 행진이어도 ‘호두까기 인형’ 수입으로 흑자 전환이 가능하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올해는 공연을 올리지 못하게 되면서 발레단들의 타격이 심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레단마다 사라진 연말 분위기에 갈증을 느낄 팬들을 위해 공연 영상 스트리밍에 나섰다. 기록용으로 촬영했던 영상이 대부분인 가운데 몇몇 발레단은 이번에 부랴부랴 새롭게 영상을 찍기도 했다.
아예 새로운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워싱턴 발레단은 ‘호두까기 인형’ 단편 영화 버전인 ‘클라라의 크리스마스 이브 드림’을 제작해 선보이고, 마이애미시티 발레단은 소외 계층을 위해 스튜디오가 아닌 야외에서 축약 버전을 라이브로 공연한다. 물론 사회적 거리두기 적용을 전제로 한다. 브루클린 발레단의 시도도 참신하다. 무용수들이 발레단 스튜디오에서 소규모 관객을 상대로 공연을 할 때 유리창 너머 외부에서 누구나 자유롭게 보도록 한 것이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