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끝내… 독하게 매듭을 짓는군요. 무섭습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윤석열 검찰총장을 직무정지 조치한 이틀 후인 지난달 26일.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장에 문재인 대통령의 과거 SNS 글이 백드롭으로 등장했다. 이 문구는 2013년 9월 혼외자 논란으로 채동욱 당시 검찰총장이 사의를 표명하자 의원이던 문 대통령이 박근혜 대통령을 겨냥해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이 글이 7년 만에 거꾸로 현재 문 대통령과 여권을 꼬집기 위한 용도로 ‘재소환’됐다.
백드롭은 17세기 후반 극장의 무대 장식을 위해 처음 등장했다. 요즘엔 무대나 회의장 뒤편에 걸어놓는 배경막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인다. 정당 지도부는 비공개 회의에 앞서 취재진 앞에서 공개 발언을 하는데 이때 지도부 뒤편에 있는 백드롭 메시지가 언론을 통해 사진이나 영상으로 국민에게 전달된다. 강렬한 백드롭 메시지 하나는 때론 회의 참석자의 발언보다 더 큰 파장을 일으킨다. 정당들이 백드롭에 각별히 신경을 쓰는 이유다.
여야의 백드롭 전쟁
코로나19 사태로 직격탄을 맞은 지난 3월 10일 더불어민주당은 ‘코로나 전쟁 반드시 승리하겠습니다!’라는 백드롭을 내걸었다. 부정적 단어인 ‘코로나 전쟁’은 당시 제1야당이던 미래통합당을 상징하는 핑크색으로 표기했고, 긍정적 단어인 ‘승리’는 민주당 상징색인 파란색을 사용해 대비를 이뤘다. 이후 등장한 ‘코로나 전쟁 승리…경제위기 돌파’(4월 15일), ‘일하는 국회…코로나·경제위기 극복’(6월 1일) 백드롭에서도 ‘코로나’라는 단어는 꾸준히 핑크색으로 표시됐다. 경제위기 돌파나 일하는 국회와 같은 표현으로 집권 여당의 책임 정치를 강조하는 한편 부정적 어휘에는 상대 당의 상징색을 사용함으로써 이미지 대조 효과를 노렸다.
반면 야당인 국민의힘은 정부·여당에 대한 비판 메시지를 직접 표현하며 응수했다. 시작은 지난 7월 16일 ‘지금, 이 나라에 무슨 일이’라는 문구였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 사건으로 정국이 뒤숭숭할 때였다.
국민의힘은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가 서울을 지칭해 ‘천박한 도시’라고 발언하자 ‘아름다운 수도, 서울…의문의 1패’라는 백드롭을 내걸었다. 또 정부·여당의 부동산 정책 밀어붙이기로 비판 여론이 고조되자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문구를 백드롭에 담았다.
지난 10월부터 정부를 정면 비판하는 메시지가 국민의힘 회의장 백드롭을 수놓았다. 10월 8일에는 ‘대통령은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문구로 북한의 우리 공무원 사살 사건 당시 문 대통령의 행적에 의문을 제기했다. 지난달 2일 ‘후보 내지 말아야죠’라는 표현은 5년 전 “재선거 원인 제공자는 후보를 내면 안 된다”고 했던 문 대통령이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 내놨던 발언이다. 같은 달 9일에는 ‘부동산 안정될 것’이라는 글귀 아래 푸른 글씨로 ‘새파란 거짓말’이라는 문구를 넣어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지적했다.
책임감 vs 상상력
민주당의 백드롭은 이해찬 대표가 물러나고 이낙연 대표 체제가 들어서면서 변화를 맞는다. 이 대표 취임 다음 날인 8월 30일 ‘우리 함께 이겨냅시다’라는 백드롭이 걸렸다. ‘원칙 있는 협치’를 강조한 이 대표의 뜻이 고스란히 담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어 10월 19일에는 ‘위기에 강한 유능한 대한민국 민주당’ 문구로 청와대와의 ‘찰떡 호흡’을 과시했다. 같은 날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위기에 강한 나라 든든한 대한민국’이라는 백드롭이 걸린 덕분이다. 2018년 6월부터 2년 넘게 걸려 있던 ‘나라답게 정의롭게’라는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 백드롭이 바뀐 만큼 그 의미가 컸다. 당내 백드롭 설치를 총괄하는 정향배 미래소통국 부국장은 4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여당으로서 국민들에게 책임감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의힘은 지난 7월부터 30대 중반의 김수민 홍보본부장이 백드롭 디자인을 주도하면서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시선을 끌고 있다.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김 본부장에게 건넨 첫 주문은 “상상력을 발휘해 달라”였다. 김 본부장은 “사전에 당 지도부에서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한 적 없을 정도로 아이디어가 존중받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공격보다는 공감의 언어
백드롭이 늘 긍정적인 효과만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잘못 디자인한 백드롭이 문제를 일으킨 사례도 있다. 국민의당은 지난 9월 17일 ‘현 병장(추 장관 아들 특혜 의혹을 폭로한 당직사병)은 우리의 아들이다’라는 문장과 함께 군인 형상을 백드롭에 담았다. 여기에 북한에서 사용하는 AK-47 소총의 이미지가 담겨 있다는 지적이 나오자 국민의당은 백드롭을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 메시지를 무리하게 담으려다 사고가 난 경우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검토 과정이 길어지면 순발력이 떨어지고 순발력을 살리다 보면 실수가 나기 마련”이라고 평가했다.
전문가들은 백드롭이 각 정당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을 국민들에게 전달하는 데 효과적이긴 하지만 활용 방법이 제한적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백드롭 문구만큼은 반드시 지킨다는 신뢰를 쌓아야 한다는 주문도 있다. 박상병 인하대 초빙교수는 “정치인의 말을 국민들이 신뢰하지 않는 상황인데 백드롭의 글자라고 더 믿을 수 있겠느냐”며 “좋은 문구를 고르기보다 행동하고 실천할 수 있는 문구를 제시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국민의힘 김 본부장은 “백드롭이 국민과의 약속인 만큼 정책국과 긴밀히 협조해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며 “백드롭이 상대 당의 실책을 지적하는 역할도 있지만 앞으로는 공격의 언어보다 공감의 언어를 더 많이 표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동우 기자 lov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