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이 나를 만들고 삶을 형성한다는 것을 꽤 오래전부터 알았다. 아침에 일어나는 즉시 물 한 잔, 스트레칭, 아무 시집이나 꺼내 시 한 구절 읽는 것, 그리고 세수와 거르지 않는 식사, 출근. 주말을 빼고는 특별한 의지나 결심 없이 순서대로 행하는 이 반복적 행위로 생활은 유지되고 있었다. 아침 습관이 나를 나다운 사람으로 만든다고 생각했다. 출근 시간이 다소 늦어진 이유를 찾다 보니 우울한 날에는 다른 때보다 공들여 머리를 감는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어쨌든 이것도 습관이었다.
낮과 밤은 나만의 시간이 아니었다. 내 습관과 취향이 주도권을 잃는 복잡한 생활이었다. 저자가 갑자기 찾아올 때도 있었고, 업무에서 사고가 발생해 느닷없이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갈 때도 있었다. 의도 밖의 일들로 낮부터 밤까지 나를 사용하기는 어쩐지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올해는 상황이 달랐다. 인간관계가 단순해지면서 약속이 현저히 줄었다. 직접 대면하지 않는 대신 랜선으로 처리할 일은 늘어났지만 이전의 복잡한 상황에 비하면 담백해진 생활이 이어졌다. 특히 저녁에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초여름 저녁에 달리기를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처음에는 2분 달리고 1분 걷는 형태를 반복하다가 점점 5분, 10분, 30분, 40분 연속 달리기를 하게 됐다. 숨쉬기가 벅차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었지만 달리기를 마친 후의 흐뭇함은 다음번 달리기의 동력이 됐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 2회는 달리겠다고 생각했다. 횟수를 그 이상으로 잡지 않은 건 달리기에 대한 부담을 조금 덜어내려는 마음에서였다. 일주일에 적어도 두 번 뛰는 것을 왜 못 하겠느냐는 심정으로 반년을 달렸다.
달리기에 대한 예찬을 지인들에게서 자주 들은 참이었다. 기록보다 중요한 건 질리지 않는 거라는 말도 들었다. 습관이 안 들어 몇 달 만에 그만뒀다는 고백이 흔했다. 달려야 한다는 의무감이 습관으로 이어지지는 않더라는 얘기였다. 나의 달리기, 그것을 잃지 않으려면 의무감을 넘어선 무엇이 필요했다. 그게 뭘까 궁금해하고 있을 때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적어도 달리고 있는 동안은 누구와도 얘기하지 않아도 괜찮고, 누구의 얘기도 듣지 않아도 된다. 그저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응시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몇 번이나 마라톤 대회를 완주했을 정도인 그는 지금도 변함없이 달리고 있다. 일흔의 작가는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즐거움에 깊이 빠졌고, 그 힘으로 오늘도 소설을 쓰고 있는 듯하다.
나는 이제 달리는 동안 오로지 두 발과 두 팔, 호흡만을 떠올린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남의 시선도 아무렇지 않다. 달리기할 때 달리기 생각만 한다는 건 사실 대단한 경험이다. 언제나 머릿속이 부산하게 작동하고 기획 아이디어가 떠올라야만 하는 직업인으로서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텅 빈 순간이란 새로 꺼낸 찻잔 같이 깨끗한 느낌이다. 빈 찻잔을 보니 새로 담고 싶은 것들이 보이는 듯하다.
매일 달리면서 근육을 강화하고 소설 쓰기를 계속하니 몸의 시스템이 그렇게 작동하더라는 하루키에게서 리추얼(ritual)의 중요성을 본다. “소설가가 되어주세요” “러너가 되시지 않겠어요”라고 누구에게도 권유받지 않았지만 쓰고 달리고 있다는 하루키의 작품은 조금도 낡지 않고 새롭다. 이번에 출간된 작품집을 보면서 그의 작품이 습관의 보답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어 꼬부라져도 달릴 거라고, 그처럼 나도 말하고 싶다. 그건 “전갈이 쏘는 것처럼, 매미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연어가 태어난 강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원앙이 서로를 갈구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성격의 일이기 때문이라는 소설가의 비유를 대입해 나도 다짐을 했다.
다시 저녁 약속이 많아지고 대면할 인간관계를 회복해도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오늘은 저와 약속이 있어요. 달리는 습관이 들고 있으니 새로운 모습을 보시게 될 거예요.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