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법’ 아닌 ‘인간’이 완성 시킨다

입력 2020-12-10 19:30
프릿 바라라 전 미국 뉴욕남부지검(SDNY) 검사장은 ‘정의는 어떻게 실현되는가’(원제 : Doing Justice)에서 정의의 완성은 결국 인간에 기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는 “매일매일 법의 최고 목표를 달성하는 주체는 잘하든 못하든 인간이다. 정의를 실현하거나 좌절시키는 것도 인간이다”라고 적고 있다. 또 “정의 실현은 정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각 개인이 깨어 있고, 엄밀하고, 견해를 바꾸는 데 주저함이 없을 때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며 법 집행 과정에서의 신중함도 강조한다. AP뉴시스

2004년 3월 11일 유럽 역사상 최악의 테러가 발생했다. 오전 8시 직전 스페인 마드리드 중심지에서 여객 열차 4대가 테러로 폭파됐다. 10개의 폭탄 마다 농축된 다이너마이트가 주입됐고, 날카로운 못도 심어져 있었다. 테러로 191명이 사망하고, 2000여명이 중상을 입었다.

사건 발생과 동시에 수사가 이뤄졌고, 현장 채취 지문에 대한 감식이 진행됐다. 미국 FBI에도 정보가 전달됐고, 그 결과 미국에 사는 37세의 백인 변호사 브랜든 메이필드가 용의자로 떠올랐다. 그의 이력은 혐의를 더했다. 그의 아내는 이집트 출신이고, 본인 역시 이슬람교로 개종한 사실이 드러났다. 민간 감식에서도 현장 지문과 메이필드의 지문이 일치했다. 하지만 다른 증거는 전혀 없었다. 심지어 그의 여권은 만료 후 갱신되지도 않았다.

이 사건은 결국 ‘FBI의 헛발질’로 밝혀졌고, FBI는 공개사과했다. 이후 조사에서 초반 감식관이 지문을 완벽하게 분석하지 못하면서 지문들의 외관상 차이를 무시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메이필드의 이력도 FBI의 편향을 굳혀 처음 분석 결과를 뒤집기 힘들게 했을 것으로 추측됐다.

정의 실현 주체 인간


책 ‘정의는 어떻게 실현되는가’를 쓴 프릿 바라라 전 미 뉴욕남부지검(SDNY) 검사장은 이에 대해 “완벽한 법에도 한계가 있듯이, 매우 명확한 과학 역시 이를 해석하는 인간들의 실수로 인해 한계를 드러낼 때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처럼 책은 법을 통한 정의 구현을 위해 노력한 저자가 직간접적으로 겪은 현장의 사례를 바탕으로 한다. 법 집행 현장에 바탕한 ‘정의론’이면서 수사-기소-판결-처벌 등 사법제도에 대한 저자의 성찰이 녹아 있다.

수사, 기소, 판결, 처벌 네 부분으로 나눠진 책의 저변에 흐르는 저자의 생각은 ‘정의로 가는 길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결국 인간이다’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법과 정의를 조리법과 음식에 빗댄 문장에서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훌륭한 조리법이 맛있는 음식을 보장하지 못하듯, 현명한 법도 정의를 장담하지 못한다. 법은 단지 도구에 지나지 않아서 인간의 손길을 타지 않으면 보관함에 담긴 바이올린처럼 아무런 생명력도 없고 아무런 영감도 주지 못한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이러한 생각은 저자의 이력과 맞물리며 힘을 더한다. ‘미국에서 가장 저돌적이고 거침없는 검사’라는 언론의 평가에서 보듯 저자는 굵직굵직한 사건을 처리한 ‘스타 검사’였다. 월스트리트 내부자거래를 수사해 헤지펀드 거물을 대거 기소하고, 정파를 가리지 않고 유력 정치인을 기소해 유죄를 받아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인 2017년 3월 ‘오바마의 검사들’로 분류돼 해임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책에선 정의를 위해 노력한 이들의 크고 작은 활약이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살인 누명을 쓰고 17년간 복역한 이의 편지를 받아든 수사관 존 오몰리가 대표적이다. 오몰리는 우연히 읽은 편지에서 자신이 이전에 맡았던 사건 중 하나를 떠올리고 파고들었다. 다시 사건을 조사한 결과 현장 확인 작업을 게을리 한 경찰의 초동 수사 등에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오몰리의 노력으로 편지를 보낸 이를 포함해 억울한 누명을 쓴 6명의 유죄 평결이 번복됐다.

다른 지검에서 기소를 포기한 성매매 여성의 강도 피해 사건을 파고든 검사의 집요함도 눈에 띈다. 해당 검사는 선뜻 피해 사실을 알리기 힘든 처지의 피해자의 호소를 놓치지 않고 수사해 정식 재판까지 끌고 갔다. 해당 검사는 피해 여성과 같은 처지의 사람도 정의를 누릴 자격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저자에게 말했다. 피고 변호인이 재판과정에서 피해자를 ‘헤픈 여자’로 몰아갔지만 검사는 그런 이유로 해당 여성이 범죄의 표적이 되기 쉬웠다고 배심원을 설득했다. 유죄 평결이 내려지자 피해 여성은 무릎을 꿇고 울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까지 저를 진심으로 대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피의자나 증인의 마음을 열어 진실에 접근하려는 수사관과 검사의 노력도 눈길을 붙잡는다. 이들은 법이나 신분으로 압박하기보다 인간적으로 다가갔다는 공통점이 있다. 베테랑 FBI 요원이 저자에게 했다는 다음 말처럼 “교감의 순간”을 찾는 데 주력했다. “누구에게나 당신이 누를 수 있는 버튼이 있어요. 그것을 찾으세요. 그걸 찾아야만 합니다.”

깨지기 쉬운 정의

정의를 향한 이들의 반대편에는 정의 실현을 가로 막는 이들도 있다. 단적으로 앞의 사례에서도 ‘지연된 정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 수사관과 검사들 앞에는 결과적으로 정의 실현을 방해한 수사관과 검사가 있었다. 수사기관의 부패나 게으름의 문제도 있지만 사소한 실수와 오판이 누적되며 발생하는 문제도 크다. 특히 저자는 사소한 실수가 정의를 가장 크게 위협한다고 본다. “노골적인 부패와 무능력과 달리 이런 실수는 보통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또 이는 차단하거나 막아내기 힘들며, 사후에 충격에 휩싸인 대중에게 만족스러운 해명을 하기도 종종 불가능하다.”

눈에 띄는 방해자들로 대표적인 사람들은 권력자와 그 지지자들이다. 검찰 수사를 ‘마녀사냥’이라 비판하며 수사 주체에 대한 여론을 형성한다. 저자는 이란·터키 시민권을 가진 레자 자라브를 기소했을 때 터키 에르도안 대통령이 반발했던 것을 예로 든다. 에르도안 대통령을 비롯한 터키 정관계 인사를 뒷배로 둔 자라브는 이란에 대한 미국의 제재조치 위반으로 비밀 기소됐지만 이를 모른 채 미국 땅을 밟았다가 체포·기소됐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오바마 행정부 집권 마지막 주 미국을 방문해 저자의 해임과 자라브 석방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저자를 해임하지도 자라브를 석방하지도 않았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터키 국민들의 반응이다. 터키 국민들은 자라브가 미국에서 기소되자 저자의 소셜 미디어에 가입하는 등 지지를 보냈다. 앞서 자라브가 자국에서 부패 혐의로 수사를 받았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이 수사관 등을 해임하는 등 방해 조치로 수사가 결국 좌초됐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를 통해 정의가 깨지기 쉬운 동시에 사람들이 정의를 갈망한다는 교훈을 함께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책이 검찰을 중심에 두고 있는 만큼 자연스럽게 국내 상황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법치지배, 적법절차, 무죄추정 같은 표현 및 개념은 요즘 시대에 기본원칙보다는 정치슬로건으로 쓰이는 듯하다” “정의의 개념도 뒤집힌 것 같다. 누군가가 정치적으로 적이냐 동지냐에 따라, 정의의 개념도 달라지고 있는 듯하다”는 책의 표현은 국내 상황과 맞물려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책에 소개되는 개별 사건의 전개 과정 역시 흥미를 더하는 요소다. 실제 저자의 수사 일부는 미드 ‘빌리언스’의 모티프가 되기도 했다.

김현길 기자 h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