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박혜진의 읽는 사이] 자기 치유의 길, 자신을 아끼는 낯선 감각

입력 2020-12-10 19:29 수정 2020-12-10 19:29
소설 ‘유원’의 주인공은 어릴 때 겪은 화재 사건으로 감당하기 힘든 무게를 견디며 살아왔다. 죄책감, 자괴감, 미안함 등이 뒤섞여 버겁지만 친구 수현에게 마음을 열면서 서로의 짐을 나누게 된다. 게티이미지뱅크

‘에세이의 시대’라는 말에 대해 거듭 생각해 본다. 서효인 시인의 말처럼 요즘은 정말이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채널을 가질 수 있다. 취향을 드러내고 생활감을 공유하는 건 주목받는 콘텐츠가 되기에 충분하다. 대단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더 많은 호응을 받을 수 있다.

모두가 새롭게 등장할 ‘나’를 기다린다. ‘나’는 이제 거대한 장르다. 에세이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에세이적 인간으로 거듭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우리는 자기 표현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기 표현적 인간들이다.

관종과는 다르다. 타인의 관심을 받는 것이 ‘나’를 표현하는 데 중요한 동기가 되는 건 사실이지만 자기 표현적 인간들에게 더 중요한 건 바깥에서 출발해 내게로 도착하는 관심보다 안에서 출발해 바깥으로 도착하는 소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을 표현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자기 자신을 아는 것부터가 난관이다. 자신을 아는 데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솔직함이라는 마음의 기술인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솔직함을 검증할 수 있는 사람도 자신이 유일하다는 점이다. ‘나’라는 영역에 있어서는 자신이 증인이고 자신이 판사다.

김현진은 솔직한 사람인 것 같다. 자신이 자신의 증인이고, 또한 그런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판사다. 무엇보다 나는 그가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는 게 좋았다. 증인이고 판사인 사람들도 종종 피해자로서의 자신에 과몰입하는 경우가 있다. 자기연민이 많은 사람이 그렇다. 자기와 너무 가까워진 나머지 그때 그 불행의 일면에 자신을 통째 내어주는 사람은 농담으로 전유할 수 없다. 농담은 스스로에 대한 관찰과 판단, 이른바 여유, 혹은 거리가 전제될 때 가능한 삶의 예술이다. 농담이야말로 인생의 고수를 판별할 수 있는 척도일 것이다.

‘내가 죽고 싶다고 하자 삶이 농담을 시작했다’의 저자 김현진은 20년째 우울증과 사투하는 환자인 동시에 삽질하는 자신을 재료로 유쾌한 좋은 농담을 즐길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심해어처럼 가라앉은 기분 때문에 정신과 약을 한 움큼씩 먹던 시절도 있었지만 달리기를 하며 알게 된 귀한 감각, 즉 “자신을 아낀다는 낯선 감각을 소중”히 할 줄 알게 된 성숙한 사람이기도 하다. 서효인 시인이 말한 “움츠린 고귀함”을 풀어 쓰면 이와 같을 것이다.


자신을 아낀다는 낯선 감각을 배워 가는 또 다른 인간이 떠오른다. 유원이라는 아이다. 김현진의 에세이에 이어 읽을 책으로 백온유 작가의 ‘유원’을 골랐다. ‘유원’은 천형이라고밖에 설명할 길 없는 거대한 원죄를 안고 살아가게 된 어느 고등학생의 무거운 삶에 대한 이야기다. 여섯 살에 ‘나’는 아파트 화재 사건의 생존자가 된다. 이불에 쌓인 채 베란다 밖으로 던져진 ‘나’를 지나가던 남성이 받아 안으며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그러나 유원을 던진 언니는 구조되지 못했고 유원을 받아 안은 남성은 불구의 몸이 된다.

이후의 삶은 우리가 예상하는 바와 같거나 그보다 훨씬 나쁘다. 유원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기가 힘들다. 언니 몫까지 행복하게 살아야 할 것 같은 부담감, 힘들 때마다 찾아오는 아저씨에 대한 미움. 아침마다 미안해하며 눈뜨는 유원의 감정은 언제나 죄책감과 자괴감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누구에게 미안한 걸까. 유원이 가장 미안해해야 하는 대상은 유원 자신일지 모른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과 자신 때문에 불구가 된 아저씨에 대한 미안함은 유원으로 하여금 자신을 아낄 수 있는 최소한의 감각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현진 작가에게 달리기가 그랬던 것처럼 유원에게는 친구가 낯선 그 감각, 그러니까 자신을 아낀다는 감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주는 선물 같은 존재다.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신을 귀하게 대해 주는 일은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기 위해 애쓰는 인간에게 꼭 필요한 너그러움일 것 같다. 물론 모든 상처를 혼자 힘으로 치료할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타자의 관심으로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상처가 인생에는 더러 찾아오고, 그럴 때 우리는 비축해 두었던 그 낯선 감각, 그러니까 자신을 아낀다는 낯선 감각을 반복하며 조금씩 괜찮아질 것이다. ‘에세이의 시대’라 쓰고 자기 치유의 시대라 읽는다.

박혜진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