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나무와 풀과 채소가 땅에서 자라지 않고 안개만 지면을 적시던 먼 옛날 일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빚고는 동방에 에덴동산을 만들어 그를 그곳에 두셨다.(창 2:5~8) 그리스도인이라면 잘 아는 이야기지만, 한 구절씩 곱씹으면 흥미로운 순서를 발견할 수 있다. 물리적 ‘공간’이 창조되고 인간이란 특별한 피조물이 등장한 후 에덴이라는 ‘장소’가 마련된다. 이곳에서 인간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사람답게 활동한다.
우리가 혼용하곤 하는 공간과 장소란 단어는 일상언어에서 꽤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인간은 공간 속에 살아갈지라도, 모든 공간을 똑같이 경험하진 않는다. 몸을 가진 인간은 이곳 혹은 저곳에 위치하고 그 장소에 소속돼 특수한 역할을 맡고 관계를 형성한다.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에 따르면 공간과 장소의 이런 차이는 성서에서 중요한 주제다. 이스라엘이 갈망한 것은 단지 팔레스타인에 있는 물리적 공간이 아닌 하나님 약속이 성취될 장소였다. 나라를 잃고 포로로 끌려간 낯선 공간에서도 기억할 장소가 있었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으로 남을 수 있었다.
장소가 물리적 공간으로 환원될 수 없듯이 장소에 속한 몸은 살덩어리 이상의 중요성을 지닌다. 특별히 장소에 깊이 결부될 때 몸은 호소력 짙은 언어가 된다.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 함께 있는 것은 말로 표현 못할 위로이자 그와 연대한다는 표시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은 상징적 장소에 자신의 몸을 드러냄으로써 정의를 회복할 것을 호소한다. 우리가 특정 장소에 의도적으로 참여할 때, 몸은 나를 표현하고 나를 읽어내는 소리 없는 말 혹은 기록되지 않은 글이 된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거하심으로써 어떤 종교적 웅변보다 더 강렬하게 인류에게 말씀했다. 그 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단지 건물로서 공간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신앙을 형성하고 서로를 형제자매로 확인하는 장소가 됐다. 하나님 앞에 함께 모이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 읽고 음식을 나누며 경험하던 각자의 ‘몸’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표현하고 소통하는 언어였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류가 당연시하던 몸과 장소의 연결이 끊겼다. 온라인 예배가 장소 감각을 급격히 바꿔놓자, 많은 그리스도인이 정체성과 연대를 표현하던 ‘몸의 언어’가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는 것을 경험했다. 외국어를 강제로 써야만 하는 이질적 환경 속에 갑자기 던져진 것과 비슷하다.
새 언어를 어쩔 수 없이 써야 한다는 건 무시할 수 없는 큰 도전이다. 나를 표현하고 이웃과 관계를 맺으며 세계를 인식하는 기본적 행위마저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런 경험은 외국어를 배울 때 자연스럽게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럴 때 낯선 언어를 공부하는 것은 어렵고 시간도 필요하며 간혹 오해도 생긴다는 것을 인정하면 상황에 수월히 적응할 수 있다. 반면 조바심을 내고 실수를 두려워하며 잘못 하나하나를 지적하면 새 언어가 몸에 새겨지기 힘들다.
코로나19의 충격파는 새해에도 계속될 전망이다. 전 세계로 바이러스가 퍼진 만큼 인류는 공간을 새로이 경험하고 있다. 몸과 장소의 연결고리도 재구성됐다. 누구도 자발적으로 들어간 상황이 아니지만, 누구나 겪어야 할 과제인 셈이다. 당분간 낯선 몸의 언어를 익히고 사용해야 하는 만큼, 윽박지름보다는 서로를 격려하며 실수를 보듬어줄 수 있는 여유와 배려가 더욱 소중하다. 외국어 입문서 머리말에 꼭 써놓는 단순한 조언이 팬데믹 상황 속 신앙인에게 꼭 필요한 지침이 됐다.
김진혁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교수
약력=연세대 및 미국 하버드대 신학대학원(MDiv) 졸업, 영국 옥스퍼드대 철학박사(조직신학 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