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업사원으로 일하다 실직한 50대 브라질 여성 마르시아 라모스는 뒤늦게 법학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난관에 봉착했다.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국립고등교육시험(ENEM)이 지난 10월에서 내년 1월로 연기됐기 때문이다. 지난달 ENEM 응시 접수를 한 브라질 수험생은 600만명가량이다.
라모스는 비영리 단체가 무료로 운영하는 시험준비반에서 공부를 해왔다. 하지만 이마저도 원격 수업으로 바뀌고 말았다. ENEM이 연기되자 일부 대학들은 별도의 입학시험을 만들어냈다. 대학별 시험을 준비할 경제적 여력이 없는 라모스 같은 이들에겐 달갑지 않은 소식이다.
미루고 취소하기엔 너무 중요한 시험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팬데믹이 전 세계에 ‘고위험 수학능력시험’에 대한 고민을 던졌다”면서 “수능은 대규모 감염을 일으킬 우려가 있어 일부 국가는 취소하거나 연기하기도 했지만, 너무나 중요한 시험이기 때문에 강행하는 경우가 많다”고 보도했다.
여기서 말하는 ‘고위험’은 바이러스에 감염될 위험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단 한 번에 너무 많은 것이 결정되는’ 시험이라는 의미도 있다. 대학 입학을 결정하는 각국의 수능은 많은 경우 그렇다.
중국에선 지난 7월 1000만명의 학생이 수능인 ‘가오카오’에 응시했다. 한 달 연기 후 실시된 시험은 이틀 일정으로 거리두기 등 방역수칙을 지키면서 진행됐다.
한국도 지난 3일 수능을 치렀다. 고사장에선 관계자들이 페이스실드(안면보호대)와 방호복 등을 갖춰 입었고, 책상 위엔 비말 차단용 아크릴 가림막이 설치됐다. 3800명에 달하는 자가격리 대상 수험생과 확진자들은 일반 시험장과 떨어진 별도 시험장에서 시험을 봤다.
유럽의 경우 독일은 졸업시험을 예정대로 진행했다. 이탈리아는 졸업생 필기시험을 취소하고, 구술시험은 허용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그 반대로 실시했다. 영국, 프랑스, 아일랜드는 대입 시험을 취소했다.
코로나19 최대 피해국인 미국에선 대입 지원자들의 학업 능력을 평가하는 수학능력적성검사(SAT 또는 ACT)가 난항을 겪고 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지역별 시험장이 폐쇄된 탓이다.
콜 스트라찬(18)은 학사관리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미국 공립학교인 매사추세츠주 보스턴라틴스쿨에 재학 중이다. 스트라찬은 올 봄 SAT을 치르기 위해 공부했지만 3월과 4월 시험은 모두 취소됐다. 9월에 가까스로 시험을 치를 수 있었지만 11월까지 성적표가 나오지 않았다.
스트라찬은 SAT 결과 없이 7개 대학에 지원서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팬데믹 상황이 아니었다면 나의 지원 대학 리스트는 바뀌었을지 모른다”고 털어놨다.
뉴욕타임스(NYT)는 “SAT나 ACT에 응시하던 수천 명의 학생들은 바이러스 때문에 국내 시험장이 문을 닫으면서 좌절했다”며 “지난달엔 SAT을 접수한 31만2000명의 학생 가운데 30%가 응시할 수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회의론 커지는데… 마땅한 대안 없어
팬데믹으로 고위험·고부담 수능에 대한 회의론이 더 강해지긴 했지만 수능에 대한 논란은 꽤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한 번의 시험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시스템을 유지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 있다.
미국 워싱턴 소재 싱크탱크인 글로벌개발센터(CGD)는 “수능 평가는 족벌주의의 기회를 제거함으로써 교육 혜택을 배분하는 공정하고 투명한 방법으로 도입됐지만 부유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더 좋은 학교에 진학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면서 “사회경제적 지위는 시험 결과의 예측 변수가 됐다”고 진단했다.
팬데믹은 수능 제도를 더욱 위협할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등은 수능을 폐지하는 방향으로 교육 개혁을 시도하고 있다. 미국 내 대학들은 지원자들에게 SAT나 ACT를 요구해 왔지만 올해 많은 대학들은 이를 지원 자격 요건에서 제외했다. 미국 4년제 대학의 약 70%가 올해 별도 입학 시험을 도입했는데, 이는 팬데믹 이전보다 약 45% 증가한 수준이라고 이코노미스트는 분석했다.
팬데믹 상황이 악화되면 언제든 학교 문을 닫을 수 있다는 점에서 당장 내년도 수능에 대한 결정을 재촉한다. 팬데믹 이후 중등학교졸업시험(GCSES)의 존치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영국의 경우 지난 10월 중등학교 출석률은 지역에 따라 60%까지 내려갔다.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에서 출석률은 더 낮게 나타났다. 정치권에선 “전염병이 (건강이 아닌) 다른 면에서 청소년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며 “일반적인 시험을 치르도록 요구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수능을 대체할 수단이 마땅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점점 커지는 교육 격차를 최소화하는 제도가 그나마 수능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학교 수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수능을 유지하지 않고 학생들이 개별적인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면 교육 격차 문제가 오히려 더 크게 발생한다는 것이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