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시대다] 가부장제·성차별에 확대경… 1990년대식 해법으로 풀어내

입력 2020-12-12 04:05
1990년대 초 가부장제 가족관계의 변화와 성차별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드라마가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바로 ‘사랑이 뭐길래’(1991)과 ‘아들과 딸’(1992)이다.

‘사랑이 뭐길래’의 대조적인 두 가정

가부장제 가족 관계 변화를 다룬 1990년대 초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의 한 장면. ‘사랑이 뭐길래’는 가부장적인 집안과 민주적인 집안이 사돈을 맺으며 벌어지는 일을 유쾌하게 그려냈다. MBC 제공

김수현 극본에 박철 PD가 연출한 MBC ‘사랑이 뭐길래’는 가부장적인 집안과 민주적인 집안이 사돈으로 맺어졌을 때 벌어지는 갈등을 코믹하게 그렸다. 두 집안의 문화는 판이하지만, 대발(최민수)과 지은(하희라)은 서로의 매력에 빠져 결혼한다.

대발이 아버지(이순재)는 억압적인 가부장이다. 낡은 집에 살면서 아내를 위해 일절 돈을 쓰지 않는다. 반면 불우이웃돕기 등에는 큰돈을 기부하여 칭송받기 때문에, 대놓고 욕을 하기도 힘들다. “남자는 하늘”이라 외치는 그는 지금의 눈으로 보자면 폭력적인 가부장의 전형이지만, 드라마는 그를 다소 코믹하고 속정 깊은 캐릭터로 그린다. 시청자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으며, 배우 이순재는 ‘대발이 아버지’ 이미지로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폭력적인 가부장으로 비판받기보다는 ‘검소하고 공익을 먼저 생각하는 올곧은 아버지’ 상으로 소비된 것이다.

지은 아버지(김세윤)는 당시로는 드물게 아내와 딸을 존중하며 가사노동도 마다하지 않는 로맨티시스트다. 하지만 지은 엄마(윤여정)의 시집살이도 녹록지 않다. 시어머니(여운계)와 두 이모까지 세 노인을 모시니 말이다. 지은 엄마는 지은이가 계속 공부하길 원했지만, 숨이 턱턱 막히는 집 아들과 결혼해 시집살이하게 된 것이 못마땅하다. 오히려 평범해 보였던 둘째 딸(신애라)이 독신을 선언하고 남자의 키스에 비명을 지르며 거부하는 행동을 보인다. 하지만 그도 곧 무난히 결혼한다. 둘째 딸이 약사로 생활능력이 있음에도 독신 선언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데는 이는 시대적 한계가 감지되는 대목이다.

드라마는 평등한 가정에서 기대를 받으며 자란 고학력 여성이 가부장적인 집안의 며느리가 되어 시집의 문화를 조금씩 바꾸어내는 과정을 유쾌하게 그린다. 온건하게 개혁되는 가부장제를 슬랩스틱이 가미된 시트콤처럼 그린 드라마의 한계는 뚜렷하지만, 두 집안의 문화를 대조적으로 보여주며 큰 틀에서 가부장제의 문제를 조망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다만 부족함 없이 자란 고학력 여성이 왜 현모양처가 되려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보인다. 드라마는 그 이유를 남자에 대한 사랑으로 갈음하는데, 이는 김수현 작가의 2002년도 드라마 ‘내 사랑 누굴까’에서도 반복된다. 개방적이고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고학력 여성이 대가족의 며느리가 되길 원하고, 이를 위해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기울인다. 결국 이들은 시집에서 현명한 며느리로 인정받고 시집을 어느 정도 변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드라마는 대발 아버지가 지은을 칭찬하고, 국가부채가 해소되면 ‘현대식 문화주택’을 지어주겠노라 약속하고, 아픈 아내를 위해 밥을 지으려다 밥솥을 엎지르는 것으로 끝난다.

성차별 잔혹극 ‘아들과 딸’

‘아들과 딸’의 한 장면. ‘아들과 딸’은 남아선호사상이 깊게 뿌리내린 집에서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 이야기로 호평을 받았다. MBC 제공

박진숙 작가와 장수봉 피디가 만든 MBC ‘아들과 딸’은 가정 내 성차별에 확대경을 들이댄 문제작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의 생활상을 꽤 정확한 고증으로 재현하여 당시 중장년층의 향수를 자극하는 시대극이기도 하였다. 드라마는 1949년생 쌍둥이 남매, 후남이(김희애)와 귀남이(최수종)의 삶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며, 가부장제의 지독한 성차별을 그린다.

딸 셋을 내리 낳고 시모에게 구박을 당하던 엄마(정혜선)는 쌍둥이로 아들을 얻자 귀남에게 모든 사랑을 쏟는다. 반면 쌍둥이 딸 후남은 대놓고 미워한다. 생일날에 귀남은 생일상을 받고, 후남은 생일상을 차린다. 고등학생이 된 귀남에겐 자전거를 사주고, 후남은 걸어 다니게 한다. 원래 고등학교도 귀남이만 보낼 생각이었는데, 공부 잘하는 후남이가 장학금을 받아서 진학시킨 것이다. 귀남이가 대학에 떨어지고 몰래 시험을 친 후남이 합격하자, 엄마는 급제 운을 후남이 다 가져가서 귀남이 떨어졌다며 악담을 퍼붓는다. 급기야 엄마 돈을 훔쳤다는 누명을 쓴 후남은 가출한다. 펜팔 친구 미현(채시라)이 사는 서울로 올라온 후남은 공장에 다닌다. 출판사 교정 일을 하며 방통대를 다니느라 결핵에 걸리는 등 온갖 고생 끝에 결국 국어교사이자 작가의 꿈을 이룬다. 후남을 오랫동안 보아온 석호(한석규)와 결혼도 하는데, 귀남의 친구이자 검사인 석호와 결혼하는 후남에게 엄마는 “그럼 귀남이 입장은 뭐가 되냐”며 끝까지 쓴소리를 퍼붓는다.

반면 ‘7대 독자’로 과도한 기대와 보호를 받으며 자란 귀남은 법대에 진학해 사법고시에 도전하지만, 여러 번 낙방하고 평범한 은행원이 된다. 그는 후남에게 부채감을 느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미현에게 연정을 품지만 우유부단하게 떠나보내고, 어려서부터 자기를 좋아하던 성자(오연수)와 무난한 결혼을 한다. 딸만 둘 낳은 성자에게 엄마가 닦달해대지만, 이를 비판하는 것도 귀남이 아닌 후남이다. 후남과 석호에게 열등감을 지닌 귀남은 은행을 그만두고 다시 고시생이 된다.

한편 미현은 애초에 아버지가 없다. 미용실 원장인 엄마(고두심)와 살림하는 미혼의 이모(선우은숙)가 함께 산다. 가부장이 없지만, 그렇다고 가부장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미혼모로 사회적 차별을 당해온 엄마는 미현의 결혼에 집착하여 일찌감치 선을 보게 한다. 미현은 귀남과 사귀지만, 양쪽의 반대에 부딪힌다. 후문에 의하면 미현이 귀남의 아이를 낳아 미혼모가 되는 설정이었지만, 미혼모를 미화할 우려가 있다는 반대여론으로 수정되었다고 한다. 결국 미현은 남자에게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살겠다고 유학을 떠나버린다. 반대 이유는 보수적이었지만, 진취적인 결말을 낳은 셈이다.

드라마가 가부장제를 고발하는 문제의식은 높지만, 지금의 눈으로 보았을 때 한계가 분명하다. 첫째 드라마는 귀남을 통해 가부장제의 수혜자처럼 보이는 아들도 피해자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일견 맞는 말이고, 일생 마마보이로 사는 그가 안쓰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귀남의 용렬함을 냉정하게 직시하기보다 여전히 온정적으로 바라보며 미현과 성자의 사랑을 받는 남자로 그릴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둘째 차별의 가해자가 엄마이고, 아버지(백일섭)는 방관자로 그려진다. 아버지도 6대 독자로 자라 논길에 백구두를 신고 걸으며 “홍도야 우지 마라”를 부르는 한량이 되었다. 살림을 떠맡은 아내에겐 “여편네가 남자 하는 일에 뭔 참견이냐”고 면박을 주기 일쑤다. 엄마의 강퍅한 삶에 원인을 제공한 무능한 아버지지만, 모녀의 갈등에선 한발 떨어져 있고 후남에게는 허허실실 관대한 아버지처럼 보인다. 즉 가부장제의 모순을 그린 드라마에서 후남 엄마만 고부갈등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며, 모녀 관계도 파탄 내는 악인으로 그려진다. 요컨대 여자의 적은 여자이고, 남성은 면죄를 받는 구도가 되는 것이다.

셋째 후남이 공장에서 만나는 옥자(박선영)는 퀴어적 느낌을 주는데, 후남은 그에게 두려움을 느낀다. 옥자는 드라마 후반에 아이와 함께 성공한 후남을 찾아오는데, 그의 퀴어적인 이미지를 굳이 부인하는 확인사살처럼 보인다. 또한 초반에 극의 중심을 이끌던 미현과 후남과 우정도 귀남과의 이성애로 혼탁해진다. 드라마가 공고한 이성애 중심주의를 취하지 않았다면 후남과 미현, 후남과 옥자 사이에 더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지 않았을까.

방영 당시 드라마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시모도 계모도 아닌 친모가 딸에게 가하는 심리적 학대를 보면서, 모성이 자연적인 감정이 아니라 가부장적으로 학습된 감정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은 앞 세대의 성차별이 이렇게나 끔찍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면서 ‘지금은 저 정도는 아니니, 많이 좋아졌다’며 안도했다. 물론 90년대는 60년대와 달리 가부장제에 대한 반성이 이는 시기였다. 그러나 1990년대에도 성감별을 통한 여야 낙태가 횡행하였으며, 특히 1990년생 ‘백말띠’ 여아의 낙태는 극심해서, 출생성비가 116을 기록했다. 이런 아이러니는 지금도 계속된다. ‘82년생 김지영’을 통해 현세대가 겪은 미시적 차별이 논의되고 있지만, 여전히 ‘60년대 생이라면 모를까 80년대 생이 무슨 성차별이냐’는 흰소리를 해댄다. 60년대에도 90년대에도 2020년대에도 성차별은 존재한다. 다만 ‘지금은 그때보다 낫다’는 위안과 함께 현재의 성차별을 보지 않으려 하는 완고함이 있을 뿐이다. ‘49년생 후남이’가 ‘82년생 김지영’에게 어떤 위로와 성찰의 말을 건네는지 귀를 기울일 때다.

황진미 대중문화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