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10월 24일, 뉴욕 주식시장이 대폭락 하면서 대공황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1차대전 이후 미국은 하딩-쿨리지-후버 정권으로 이어지는 자유 방임주의로 인해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1920년대 중후반 정점에 오른 이러한 정책은 경제성장의 과실이 기업가와 일부 부유층에게만 돌아가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심화시켰다. 그리고 투기성 주식에 자금이 몰리다가 결국 주식 시장 붕괴로 인해 기업 파산, 실업률 증가, 소비 위축으로 이어지는 암흑의 생태계가 구축되었다.
뉴욕 주지사 출신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거대한 국가적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국민 구제 프로젝트인 뉴딜정책을 시행했다. 덕분에 그는 위기를 기회로, 불안을 희망으로 바꾼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차례 공연된 뮤지컬 ‘애니’의 주제곡 ‘투모로우(내일)’는 1930년대 경제공황에 빠진 암울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미국인들에게 빨간 머리의 11살 고아 소녀 애니가 희망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내일’이란 항상 하루 뒤에 오기에 널 사랑한다는 내용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의 에너지를 갖게 한다. 이 뮤지컬에 루스벨트가 직접 실명 캐릭터로 등장해서 백악관에서 애니와 함께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현실과 허구가 혼합된 이른바 아메리칸 ‘국뽕’ 콘텐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애니’와 함께 또 다른 위기 극복 뮤지컬이 있다. 바로 코러스 대역 배우 페기 소여가 주연으로 성장하는 내용을 담은 ‘42번가’다. 이 작품은 1932년 처음 소설로 나왔으며, 이듬해엔 당시 붐을 일으키기 시작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흥겨운 탭댄스 리듬에 맞춰 일사불란한 앙상블 장면들이 이 영화는 1980년 무대 뮤지컬로 만들어져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번 공연을 했고 올해 역시 코로나 시국에도 불구하고 큰 인기를 끌었다.
영국의 티켓 예매 및 정보 제공 사이트 왓츠온스테이지가 운영하는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The Shows Must Go On!)’ 채널은 지난 6~7일 주말 48시간 동안 ‘42번가’를 무료 스트리밍 했다. 웨스트엔드 역시 코로나로 인해 오랫동안 극장가가 닫혀있는 상태인데, 이번에 상영한 프로덕션은 2017년 3월 런던 드루레인 극장에서 개막해 1년 반 동안 흥행한 새 프로덕션이다. 출연 배우만 60명에 달한다. 코로나가 한창인 올해 8월 영국의 영화관에서 실황 공연이 상영됐으며 이번에 코로나에 지친 전 세계 뮤지컬 애호가들을 위해 유튜브에 무료로 공개한 것이다. ‘42번가’의 유튜브 등판은 그만큼 지금의 시기가 90년 전 경제공황에 비견되는 어려운 때이며 모두에게 위로와 긍정이 필요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배경은 경제 공황기를 맞은 미국의 1930년대 보더빌(Vaudeville:유명스타 위주의 단막극을 모은 버라이어티쇼) 극단이다. 시골 출신 페기 소여가 앙상블 로 연습에 들어갔다가 주연 여배우의 급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대역으로 출연, 그 꿈을 이루는 일종의 신데렐라 스토리다. ‘애니’처럼 그 당시 경제 공황기를 극복하자는 강력한 메시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당시 흥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보더빌 극단을 통해 당시 공연계의 위기를 다루고 있다.
1920년대 중반 미국은 집마다 라디오가 보급되고 1927년부터는 극장 대신 영화관에서 뮤지컬이 저렴한 가격으로 상영되기 시작하면서 문화예술 소비에 혁명적인 변화가 시작됐다. 당시 상대적으로 고가인 보더빌 쇼에는 타격이 컸다. 하지만 그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단순하다. 서로를 위하고 무대의 소중함을 안고 공연에 임하는 것 그뿐이다.
‘42번가’는 시대의 어려움을 극복하자고 웅변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현실은 어둡고 답답할지라도 어깨를 움츠리며 걷지는 말자고 말할 뿐이다. 오히려 브로드웨이 42번가를 상징하는 화려함을 위해 매진한다. 훗날 이 시기를 추억할 때 구부정했던 내 모습만 기억나게 할 필요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