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찾은 제주 한림읍 김수자(77) 권사의 집은 작은 마당에 빨랫줄이 늘어진 소박한 모습이었다. 현관으로 들어서자 ‘오직 예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이라는 현판이 손님들을 맞이했다. 곳곳에 말씀이 적힌 현판과 기독교 성화가 걸려있었다. 거실 왼편의 피아노 위엔 월드비전의 1000만원 이상 고액후원자에게 지급되는 ‘비전소사이어티’ 위촉패와 기념사진, 김 권사가 후원한 마을의 사진 등이 놓여있었다. 김 권사는 2015년부터 올해까지 월드비전 등에 총 1억여원을 기부했다.
“정말 어렵게 돈을 다 보냈어. 참 기가 막히게 살았거든. 우리 아이들한테 아이스크림 한 번 사준 적 없고, 내 돈 주고 뭘 사 먹어 본 적도 없었어. 그냥 하나님밖에 모르고 살아왔고, 하나님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무엇이든 동참하면서 살아오다 보니 이렇게 됐어.”
김 권사는 지난 삶을 회고하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주름지고 거친 손엔 고된 세월의 흔적이 가득했다. 38살에 남편을 잃은 그는 40년간 홀로 남편이 남긴 빚을 갚으며 세 아들을 키웠다.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했다. 가장 오래 한 일은 닭 장사였다. 손수레를 끌고 양계장에 가서 닭을 잡아 오고, 집에서 닭을 손질해 시장에 가져다 팔았다. 자식들이 장성한 후에도 공공근로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어렵게 모은 돈으로 빚을 갚고 지금 사는 이 집을 자신과 세 아들의 공동명의로 마련했다. 세 아들은 모두 목회자가 됐다.
그는 “일하는 동안 애들을 볼 수 없으니 뛰어놀아도 교회 마당에서 놀고, 공부해도 교회에 가서 하라고 늘 교회에 맡겼다”며 “힘든 형편에도 매일 새벽기도를 나가고 가족들의 이름으로 1평(3.3㎡)씩 건축헌금을 내며 신앙을 붙잡고 살아왔는데, 아이들이 믿음을 잘 키워서 주님의 일을 하게 됐다. 하나님의 큰 은혜”라고 말했다.
기부를 결심한 건 2015년 먼저 세상을 떠난 둘째 아들이 꿈에 나오면서다. 김 권사의 둘째 아들 이성진씨는 교육전도사를 하던 중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아들과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어렵게 살아온 김 권사에겐 큰 충격이었다. 여전히 둘째를 떠올리는 일이 힘든 듯 김 권사의 목소리엔 떨림이 묻어났다. 긴 시간 힘들어하던 그의 꿈에 둘째 아들이 나타났다. 꿈속 아들의 모습은 작고, 숨을 못 쉴 정도로 괴로워하는 모습이었다고 했다.
“멀리서 그 애가 걸어오는데, 점점 모습이 어려지는 거야. 앞에 올 때쯤엔 10살 정도의 어린아이가 돼 있었어. 그런데 얘가 누더기를 입고는 물도 못 먹어서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목말라하고 힘들어하는 거야. 꿈에서 깬 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살 수가 없었어. 그러다 이렇게 목말라하는 아이들을 살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지.”
그는 둘째 아들 몫의 재산을 식수 사업을 위해 기부하기로 했다. 가족들도 김 권사를 지원했다. 기부처를 찾던 김 권사에게 월드비전을 처음 권한 건 큰며느리였다. 직접 알아보기 어려워 도움을 받고자 큰며느리가 있는 대구로 가려 했는데, 직전 주일에 김 권사가 출석하는 한림교회(김효근 목사)에서 월드비전 사역 보고회가 열렸다. 그는 “낯선 지역에 가서 돈을 기부하려고 준비를 다 했는데, 제주도의 교회로 찾아온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보내셨구나’ 싶었다”고 전했다.
5년에 걸쳐 월드비전에 전달된 기부금 7500만원은 방글라데시 베트남 에스와티니(스와질랜드) 케냐 등 6개 나라의 식수 위생 사업에 쓰였다. 김 권사는 자신의 이름 대신 둘째 아들 이씨의 이름을 현지 현판에 새겼다. 선교사와 탈북민 교육단체, CTS기독교TV 등에 2500만원을 기부했다. 지인이 손주 학비에 보태라며 건네준 500여만원도 고스란히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보탰다. 그날 꿈에 또 아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아들을 생각하면 하나님 생각뿐”이라며 “아들이 다 하지 못한 하나님의 일을 대신한 것”이라고 밝혔다.
약속된 기부는 마무리됐지만, 김 권사는 앞으로도 나눔을 이어갈 계획이다. 그는 이제 아들이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매달 3만원씩 월드비전에 후원을 시작했다. 김 권사는 남은 생을 ‘보내는 선교사’로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나 살자고 바빠서 전도도 못 하고 아무것도 해놓은 일이 없는데, 기부하면서 이웃을 돕고 나누는 삶을 살아 보니 참 좋았어. 하나님이 정말 좋아하셨어. 건강도 돈도 다 하나님이 주신 거고 우리는 하나님 은혜로 사는 거니까 이제라도 이렇게 갚아야지. 이제는 돈도 없지만, 조금씩이라도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나누면서 보내는 선교사로 살아가고 싶어.”
제주=양한주 기자 1wee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