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죽을래 과장’만큼만 해라

입력 2020-12-08 04:02

1990년대 후반 통일·외교 부처를 출입할 때다. 당시 모 국장에게 물었다. “공무원들은 언제쯤 소신대로 일을 할까요.” ‘영혼 없는 공무원’을 꼬집는 질문에 그는 “차관이 되면 할 말은 하게 될 것”이라 했다. 해당 국장은 이후 차관으로 승진했지만 역시나(?) 정권의 지시만 따박따박 따랐다.

희미한 기억이 소환된 것은 지난 주말 산업통상자원부 국장과 서기관의 구속 소식을 접한 뒤다. ‘월성 원전’ 조기 폐쇄 결정에 대한 감사원 감사 직전 공문서를 없애고 이를 지시한 혐의인데 ‘정권의 종’이 된 공무원의 숙명을 또 한 번 실감했다.

공무원은 진보나 보수 누가 집권하든 정권의 국정 기조에 맞추다 보니 ‘영혼 없는 존재’로 불린다. 박근혜정부의 국정농단 당시 부당한 권력의 지시를 따른 공무원의 행태에 비판이 많자 야당은 가칭 ‘영혼 없는 공무원 방지법안’까지 발의했다.

정권이 바뀐 지금, 월성 원전 공무원 구속은 관료와 이들을 다루는 권력의 행태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음을 웅변한다. 오히려 촛불정권이라며 도덕성과 정의를 내세운 청와대와 여당의 독선은 이전보다 더하다. 공무원들은 당청의 하청업체 직원 격으로 전락했다.

경제부처 공무원들은 그동안 한국 경제의 난국을 돌파하고 비전을 제시해왔다는 자긍심이 강했다. 하지만 이들은 요즘 사석에서 깊은 자괴감을 토로한다. 실제 현 정부 들어 이들은 창의적인 정책 대신 청와대의 주문 생산에 매달려 왔다. 결과는 신통찮다. ‘소득주도성장’은 사실상 사장됐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과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사회 갈등만 부추기며 경기 활성화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 재정건전성을 촉구하다가도 당청의 질책에 꼬리내리기 일쑤다.

정권의 아킬레스 건인 부동산 정책은 현 경제팀의 실상을 낱낱이 보여줬다. 24차례의 대책이 실패했다면 무엇이 문제인지를 고민해야 했다. 가족, 이웃, 친구들에게만 물어봐도 정책 수정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침묵과 복지부동을 택했다. 국민의 원성에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물러났지만 정책 입안자들은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경제부처 공무원들은 책임감 상실을 넘어 이제는 속물적으로 변한 느낌이다. 며칠 전 경제부처 출입기자에게 김 장관에 대한 공무원 사회의 평을 물어봤다. 장관이 국민 밉상이라 공무원의 속마음도 비슷할 줄 알았다. 그런데 “국토부 직원들한테 의외로 인기가 많다. 정치인 출신답게 사람을 끝까지 챙겨주는 점을 높이 사더라”는 답에 놀랐다. ‘능력은 상관없고 우리만 챙겨주면 그만’이라는 공무원들에 어떤 기대를 할 수 있겠나.

검찰처럼 장관이나 청와대의 압력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라는 얘기가 아니다. 준사법기관인 검찰과 일반 공무원의 처지를 같이 비교할 순 없다. 하지만 상부에서 현실성 없는 경기 대책을 주문하거나 추진할 때 잠자코만 있는 것은 주권자인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월성 원전 건과 관련, 산업부 A과장은 백운규 전 장관에게 한시적 가동 필요성을 보고했다가 “너 죽을래”라는 말을 들었다 한다. A과장은 구속영장이 청구된 3명 중 유일하게 기각된 이다. 검사처럼 못 될 바에는 ‘죽을래 과장’처럼 최소한의 진실과 합리적 근거를 건의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변창흠 국토부 장관 내정자에 대해 벌써부터 ‘반시장 정책의 지속’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 임대차 3법 옹호, 공공임대 강조 등 전임과 별 다름없는 소신 때문이다. 다시 공무원의 시간이다. 24연패의 수모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장관에게 부동산 정책의 실상과 서민의 고통을 가감없이 전해야 한다. ‘죽을래’ 소리를 듣는 공무원이 많아져야 경제가 산다.

고세욱 경제부장 swk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