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 정부 모두 대북정책의 제1 목표로 북핵 문제 해결을 공언해왔다. 한국은 북핵 문제의 최대 피해자이자 당사자로서 북한의 핵 포기를 대외정책의 제1과제로 삼고 있지만, 김정은은 남북 핵 협상은 거부하고, 자기 정권 파괴능력을 가진 미국하고만 협상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갖고 있다. 그런데 역대 미 행정부도 이 문제 해결을 매우 중시한다고 말해 왔지만, 실제 정책과는 상당한 괴리를 보였다.
한·미동맹을 매우 중시하는 우리가 목도하면서도 지적하기 어려운 불편한 진실은 미국이 북핵 문제 해결을 명분으로 획득한 대북 국제 제재를 앞세워 협상을 통한 한반도 비핵화는 제쳐두고 동북아에서 자국 영향력 강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북핵 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는 오히려 멀어지고 중국의 부상을 차단하기 위해 주한·주일미군을 저렴한 비용으로 훈련시키면서 한국과 일본을 대중 견제에 앞세우는 모습이 보이는 이유이다.
우리는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가 없어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쉽게 얘기해왔다. 하지만 600배의 경제력과 200배 이상의 핵무기를 갖고 있는 적성국 미국이 육해공 각종 투발수단으로 북한을 삽시간에 초토화할 수 있으므로, 미국이 신뢰할 수 있는 보장을 제공하지 않는 상황에서 김정은이 생명줄인 핵을 포기하는 것을 기대하는 건 불합리하다. 물론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경우 우리가 정권을 확실히 붕괴시킬 수 있다면 그런 제거 방법도 생각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북한을 붕괴시키는 것은 우리도 재앙적인 피해를 보아야 하므로 불가능하다.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국제 제재로도 북한의 항복은 유도하기 어렵다. 리비아가 2003년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하고 이란이 2015년 핵 동결을 약속했지만, 미국 제재를 받은 지 30여년이 지난 뒤에 미국이 1년 이상 끈질긴 노력을 기울인 협상의 결과였다. 또 이 두 나라는 산유국이어서 제재만 풀리면 잘 살 수 있는 희망을 가진 나라였다. 쿠바는 미국 제재로 더 큰 피해를 받았지만 50여년 만에 미국만의 노력으로 부족해 교황까지 중재 노력을 더 해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응했다. 이들 모두 북한보다 군사공격에 훨씬 더 취약한 지정학적 여건을 가졌다.
제재의 주요 목적이 악행에 대한 처벌보다 비행 국가의 정책 교정이나 국제평화의 회복·개선이므로 상호주의에 입각한 진지한 협상을 통해야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은 자력갱생 경제체제로 수십년을 영위해와 제재 피해가 상대적으로 작다. 게다가 리비아 등의 나라보다 군사력이 훨씬 더 강하고, 수출품이 변변치 않아 제재가 풀린다 해도 잘 살기 어려운 데다 초강대국으로 비상하는 이웃 동맹국 중국이 조금만 도와주면 체제를 지탱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현재 미국은 상호안보에 입각한 협상을 통한 북핵 해결보다 사실상 북한의 항복을 압박하면서 제재를 대북정책 실패 감추기와 남북 관계 개선 통제, 중국과 러시아 견제 수단으로 오용하고 있는 모습이다. 미국이 진정 북핵 문제를 불가역적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우선 조건 없이 종전선언과 북·미 연락대표부 설치 의사를 밝혀 이란과의 핵 합의 파기로 추락한 미국의 국제 신뢰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선 양보, 선 행동만 요구하기보다 스냅백 장치를 적용하면서 제재 완화 및 해제를 탄력적으로 활용해 북한이 핵을 만든 기본 동기인 체제 안보를 불가역적으로 보장해 주는 진지한 협상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만약 북한이 핵을 내려놓고 국제 사회로 나온다면 시대 정신이자 우리가 바라는 북한의 민주화는 1980년대 말 동구 국가들처럼 북한 내부 동력으로 달성될 것이다.
홍현익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