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사람의 숨이 눈으로 보이는 유일한 계절이니까.” 최은영 작가가 올해 젊은작가상 수상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 이런 문장을 썼다. 문장의 내용 자체가 놀라운 사실은 아니겠지만, 문장으로 정리된 작가의 표현에 한동안 시선이 머물렀다. 서로의 숨을 눈으로 볼 수 없는 겨울이 와서다.
힘겨운 12월이다. 팬데믹은 봄과 여름, 가을을 빼앗아가더니 연말 분위기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줄줄이 취소되는 올해 송년모임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단순히 저녁 약속이 취소됐다는 의미로만 여겨지진 않을 것이다. 해가 가기 전에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내년에라도 만나기 위해 만남을 미룬다. 인생의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아까운데, 억울한 일이다. 예전 사진을 뒤적이다가 나뿐만 아니라 길거리의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쓰지 않은 풍경을 본다. 모두가 표정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 이제는 이상하게마저 보인다. 앞으로 몇 년간 해외여행은 갈 수 없을 거란 생각에 습관처럼 하던 항공권 검색도 이제는 하지 않는다. 익숙해졌다.
‘뉴노멀’은 쉽지가 않다. 익숙해졌지만 받아들이긴 어렵다. 아무런 준비 없이 ‘코로나기’를 맞은 인류는 어쩌면 여전히 현실 부적응 중이다. 바뀌어버린 일상은 대부분 여전히 적응하기 힘들다. 마스크를 쉽게 벗어던지지 못하겠지만, 계절마다 다른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실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길 기도한다.
주변에서 “요즘은 사는 게 재미가 없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일상의 작은 즐거움, 당연히 누려 왔던 것들을 박탈당한다는 건 생각보다 심각한 일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는 모두 일상을 잃었다.
올해는 그간 지나쳐 왔던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앞으로 달라질 삶의 모습을 준비하는 해였을지 모른다. 할 수 없는 일이 많아지자 정말 중요한 일은 무엇인지 생각한다. 사람들을 만날 수 없게 되니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은 누구였는지 생각한다. 살다보면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으며 그런 가운데서도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그래도,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인류에게 코로나19 팬데믹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이다. 지금 상황은 충분히 ‘최악’이며, 이보다 더 나쁜 상황은 상상하고 싶지 않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받았는지도,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고통받을지도 가늠하기 어렵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최근 일본과 한국 여성의 자살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고 보도했다. 주요 원인으로 코로나19 장기화가 지목됐다. 팬데믹이 불러온 대규모 실직과 사회적 고립, 심리적 불안이 전 세계의 사람들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고 WP는 풀이했다. 우리 정부는 지난달 30일 코로나19 대응 자살예방 강화 대책을 내놨다. 일본과 한국만의 일도, 여성들만 맞닥뜨린 상황도 아닐 것이다.
국내 아티스트 방탄소년단(BTS)이 지난달 20일 발표한 한글 가사 위주의 신곡 ‘라이프 고스 온(Life goes on)’이 미국 음악 전문 매체 빌보드의 메인 싱글 차트에서 ‘핫 100’ 정상을 꿰찼다. BTS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어느 날 세상이 멈췄고, 비는 멈추지 않고 있다”면서도 “오늘과 내일을 또 함께 이어보자”고, “겨울이 오면 더 뜨거운 숨을 내쉬자”고 노래한다. 팬데믹에 지친 사람들에게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자고, 삶은 계속된다고 말한다.
아미(BTS의 공식 팬클럽)가 아닌 내게도 울림이 있었던 걸 보면 팬덤과 무관하게 메시지가 통한 듯도 하다. 뉴욕타임스(NYT)는 “이 노래가 실린 앨범 ‘BE’가 발매 첫 주 미국에서만 24만2000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면서 “BTS는 죽어가던 콤팩트 디스크(CD) 시장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던져줬다”고 분석했다.
예고 없이 찾아와 곧 해를 넘길 팬데믹의 끝을 여전히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일상을 이어간다.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한다. 노래 가사처럼 ‘기다림을 몰라서 눈치 없이 오는 봄’을 함께 기다려야 한다.
임세정 국제부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