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판단하고 책임지는 사람들

입력 2020-12-04 04:01

하나의 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작품의 운송과 설치는 7년째 E사장님께 맡기고 있다. 사장님은 아침 일찍 예술가의 작업실로 가서 작품을 전시 장소로 옮겨온다. 포장을 풀어 작품 상태를 함께 확인한 후에 나는 전시장 구성을 어떻게 하고 싶은지, 작품을 어디에 걸고 싶은지 설명해 드린다. 작품이나 액자의 특성, 전시장 벽이나 천장 상태에 따라 계획의 수정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협의가 끝나면 설치 시작. 갤러리의 흰 벽 위에 레이저 측정기로 빨간색 중심선이 그려지고 그 선을 기준으로 작품 위치를 조정해 나간다. 수평계, 연필, 와이어, 전동드릴 등 사장님의 장비들이 제 역할을 하고 있다.

E사장님을 볼 때면 ‘전문가’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작품 운송이나 설치가 깊은 지식이나 학위가 필요한 일은 아니지만 운전을 잘하고 공구를 다룰 수 있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사장님은 운송용 트럭을 마련하고 ‘○○아트’ 라는 사업자를 낸 후 혼자 여러 역할을 해내는 분인데 정확한 시간 개념과 성실함은 물론이고 작품을 다루는 세심함과 꼼꼼함, 작가들의 성향이나 작품 재료에 대한 관찰력이 있어 일을 할수록 신뢰가 깊어지는 분이다. 작품 이동을 위해 편리하게 개조된 낡은 수레와 꼭 필요한 장비만 들어 있는 공구함을 보면 사장님의 경험과 실력과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인쇄도 내가 하는 일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문화’ H사장님은 10년째 거래를 하고 있는 분이다. 오랜 업력으로 굵직한 클라이언트도 많이 보유하고 있고 자체 공장에서 큰 물량을 소화하는 명망 있는 인쇄소인데, 나는 창업 초기부터 줄곧 적은 발주량과 무지로 귀찮게 해드리고 있다. 인쇄에 관한 나의 얕은 지식과 경험은 모두 H사장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컴퓨터 모니터로 보는 색과 인쇄해서 나온 색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감리를 가고는 하는데 공장의 모습에서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사람과 물건이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며 불필요한 것은 전혀 없는 풍경이 무엇인지를, 내가 맡긴 일이 제대로 되겠구나 하는 느낌 말이다.

이분들은 내가 일을 하는데 꼭 필요한 파트너다. 나의 시간을 아껴주고, 나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 준다. 과정까지 믿고 맡길 수 있기에 만약 결과가 잘못돼도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운이 아니라 정확한 실력으로 불확실성을 줄여나가는 모습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학벌이나 책에서 얻은 지식보다 중요한 게 현장에서의 경험과 태도라는 걸 보여주는 분들이다.

보통 전문가라고 하면 고학력 고소득 전문직 종사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물론 한동안 의사나 변호사에게 의지했던 경험도 소중했다. 위중한 병은 아니기도 했지만 2년 정도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는 일은 생각만큼 나쁘지 않았다. 몇 주 간격으로 만나 내 몸의 상태를 체크해 주고, 나의 아픔을 헤아려 주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위안이 되기도 했다. 많은 환자들의 다양한 케이스를 경험한 의사가 나를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정감을 주었다.

법원에 가는 일도 그랬다. 원치 않는 소송에 휘말린 것은 고통이었지만, 이슈와 증거들을 논리적으로 정리한 변호사의 서면을 읽는 일은 구체적이고 정확한 위로가 됐다. 문제를 해결할 능력과 자격을 가진 사람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해주고, 나 대신 법정에 가서 최선을 다해준다는 믿음은 일상을 이어가게 하는 큰 힘이 됐다.

내가 좋아하는 미술품 보존복원가는 ‘전문가란 어떤 사람인가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해주었다. ‘전문가라면 판단하고, 그 판단에 책임지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학력이나 자격증과는 상관이 없다. 판단하고 책임질 줄 아는 주변의 진짜 전문가들 덕분에 내 일과 일상이 유지되고 있다. 나도 내가 선택한 분야에서 예외 없이 언제나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정지연 에이컴퍼니 대표·아트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