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기자] 고작 네트에서 생긴 일? ‘외압’에 공정이 무너진 것

입력 2020-12-03 04:01

늦둥이 동생이 오늘 수능을 본다. 동생은 지난주 코로나 때문에 수능이 연기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연기되든 말든 어차피 같은 문제로, 동등한 조건 하에서 치르는 거니 공부에 집중하라”고 말해줬다. 동생은 숙명여고에 다니는데, 사실 입학했을 때부터 시험의 ‘공정성’에 불신을 가질 계기가 있었다. 2018년 교무부장이 쌍둥이 딸에게 시험 문제 정답을 유출해 법원으로부터 징역 3년을 선고받은 사건 때문이다. 시험의 전제조건인 공정성을 훼손한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최근 김연경이 네트를 잡아당긴 행위에서 촉발된 프로배구 논란이 본보 보도로 계속 확대되자 “‘고작 네트’에서 생긴 일 갖고 뭘 그렇게 물고 늘어지나”는 식의 반응이 많았다. 경기운영본부장이 그저 “시간이 지나면 조용해질 일”이라고 이번 논란을 이해한 것도 배구판의 인식을 보여준다. 하지만 김연경 ‘네트 논란’의 본질은 ‘고작 네트’에 있는 게 아니다.

공정성의 문제다. 선수는 수능을 앞둔 수험생처럼 매일 반복되는 힘든 훈련과정을 버텨내고, 통제된 일상 속에서 경쟁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진가를 증명하기 위해 땀방울을 흘린다. 감독은 자신의 명예를 걸고 승부에 임한다. 심판도 정확한 판정을 내리기 위해 찰나의 순간에도 몇 번씩 고심을 반복한다. 프로스포츠의 존재 목적인 팬들도 ‘공정한 경쟁의 장’이란 신뢰를 갖고 경기장을 찾는다. 프로스포츠가 어떤 영역보다 공정해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한국배구연맹(KOVO)은 심판 징계로 공정성의 기반을 흔들었다. 심판은 국제배구연맹(FIVB) 규정에 맞게 판정의 재량을 행사했지만 징계를 받았다. KOVO는 이번 논란과 관련해 2일 본부장이 사임했다고 밝혔지만, 강 심판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단 게 사임 이유였다. 논란의 본질인 심판 판정에 대한 징계와 관련해선 여전히 같은 입장이다. “김연경 행위는 과했다”는 관점에서 추후 같은 행위가 발생했을 때 이를 제재할 선례를 남기기 위해 징계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FIVB 규정이 아닌 어느 정도의 로컬룰, 혹은 융통성을 가미해 내린 결정이었다고 슬쩍 발을 빼는 듯 하다.

그렇다고 KOVO가 ‘고작 네트’에 그렇게 호들갑을 떤 것에 외부 압력이 영향을 줬단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본보가 보도했듯, 본부장은 강주희 심판과 만나 “GS(칼텍스)에서 강력히 항의하고 공문을 보냈다”며 어쩔 수 없었던 징계 이유를 설명했다. 구단이 공문을 보내고, KOVO 총재 특보는 회의를 소집해 김연경 상벌위원회 개최 의견을 내고, “강주희 심판이 정당한 판정을 내렸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경기 다음날 바로 심판을 징계하는 게 KOVO의 일처리 방식이다. 심판은 불이익 처분에 대한 항의 기회를 얻지 못해 언론 인터뷰에 나섰다가 본부장으로부터 위협적인 발언을 들어야 했다. FIVB에서 인정받는 심판에게도 이럴진데, 여러 심판들이 경기 중 애매한 상황에서 소신 있는 판정을 내릴 수 있을까.

가장 선진적인 룰을 갖고 있다는 축구는 경기 중 심판 판정에 대한 제소를 허용하지 않는다. 심판 관련 사항은 완전히 독립된 심판위원회가 관장하며, 판정이 잘못됐다 해도 제재금 등 징계를 주진 않는다. 대한축구협회는 “자책골을 넣었다고 선수를 징계할 순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배구와 유사한 규정을 갖고 있는 야구도 최근 3년 간 심판이 총재 명의의 징계를 받는 일은 딱 두 번 밖에 없었다. 그것도 홈런인 타구를 홈런이 아닌 것으로 판단한 경우, 규정에 맞지 않는 투수 교체를 허용한 경우 등 오심이 명백한 때에 한정됐다. 이 모든 게 공정성의 보루인 심판 판정의 권위를 보호해 공정한 리그 운영을 가능케 하는 시스템이다.

동생은 오늘 수능을 보는데, 자기 실력과 노력에 걸맞은 성적표를 받을 것이다. 프로배구 감독과 선수들도 내년 봄에 한 시즌을 돌아보며 자신의 땀방울에 비례한 성적을 얻었다며 뿌듯해할 수 있을까. 팬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순위에 수긍할 수 있을까. ‘고작 네트’ 정도의 일이 아닌 더 심각한 사건이 터지더라도, 리그 운영 주체인 연맹이 외압에 휘둘리지 않고 중심을 잡아줄 수 있어야 프로배구의 공정성도 지켜질 수 있다.


이동환 문화스포츠레저부 기자 hu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