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나쁜 기억’이 병을 만든다

입력 2020-12-03 19:30 수정 2020-12-03 19:30
책 ‘기억 안아주기’는 일상에서 경험하는 작지만 확실히 나쁜 기억을 ‘소확혐(小確嫌)’으로 명명한다. 나쁜 기억이 만들어낸 사건이 크고 치명적이어서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로까지 나아간 건 아니지만 많은 이들을 괴롭히는 성가신 존재다. 특히 소아청소년과 의사인 저자를 찾아오는 경우 중 많은 수가 나쁜 기억이 실제 몸의 고통으로 이어지는 신체화장애로 연결되고 있었다. 저자는 “좋은 기억은 나쁜 기억을 이기는 법”이라며 나쁜 기억을 피하지 말고, 좋은 기억을 통해 해법을 찾도록 조언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영화 ‘원더풀 라이프’는 망자들이 일주일 동안 머무는 중간역 ‘림보’를 배경으로 한다. 망자들은 이곳에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추억 하나를 골라야 한다. 림보 직원들은 이들이 고른 인생의 한 단면을 짧은 영화로 만든다. 일주일이 끝나는 시점에 망자들은 영화관에 모여 각자의 추억이 재현된 영상을 본 후 천국으로 넘어간다. 천국에서 이들은 자신이 선택한 추억 한 조각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모두 잊는다.

망자들 대부분은 기억을 더듬어 떠올리기만 해도 웃음이 번지는 ‘인생 추억’을 하나씩 고른다. 반면 의외의 선택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 중 한 명은 특이하게도 5살 때 숨은 벽장 속 어둠을 선택한다. 그는 직원에게 선택한 기억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잊을 수 있는지 재차 물은 다음 “그럼 그곳은 천국이 맞네요”라고 말한다. 단 하나의 기억조차 어둠으로 남기고 싶을 만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좋은 추억 하나를 남기는 이들도 나머지 기억은 잊는다는 점에서 기억의 상당수는 힘든 것이라는 생각이 영화에 깔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쁜 기억’ 메커니즘


책 ‘기억 안아주기’는 좋은 추억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지우는 영화적 상상력과 달리 ‘나쁜 기억’과 함께 살아야 하는 우리 일상에 관한 이야기다. 부제인 ‘소확혐(小確嫌), 작지만 확실히 나쁜 기억’은 ‘소확행(小確幸)’에서 가져왔다. 행복만 나쁜 기억으로 바꿨다. 소아청소년과 의사인 저자가 25년 넘게 진료한 경험이 책의 밑거름이 됐다. 저자는 “아이들의 고통이 진짜 질병이 아니고, 그 아이의 과거 경험과 기억에서 비롯된 게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 “더 놀라운 점은 병이 없던 아이를 환자로 만든 사람이 가족이나 의사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한다. 그렇다고 아이들에 초점이 맞춰진 책은 아니다. 개인과 사회에서 나쁜 기억이 형성되는 과정과 그것이 미치는 영향, 치유 방법 등을 설명한다.

‘기억…’에 소개된 안타까운 사례는 고통의 원인을 몸의 병으로 단정하고,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은 가족과 의사의 잘못으로 요약할 수 있다. 프롤로그에 소개된 18개월 수미는 9개월간 변비 치료를 받았지만 원인은 나쁜 기억에 있었다. 6개월에서 돌 사이 변이 딱딱해지는 시기에 항문이 찢어지는 통증을 느낀 아이는 변에 대한 두려운 기억을 갖게 된다. 문제는 이 시기 어른들의 잘못된 관여다. 부모와 조부모는 아이가 변을 보는지 노심초사하고, 변을 볼 때 ‘응가 응가’하며 아이 주위에 몰려들어 응원하지만 아이에겐 그게 더 부담이다. 병원에선 부모의 불안에 맞춰 관장을 하고, 두려움을 체화한 아이는 항문 근처를 향하는 손길에 공포를 느낀다.

잦은 복통과 설사로 내시경까지 한 고교 1학년 성필이도 과거의 경험이 고통을 유발한 경우다. 긴장이나 스트레스를 받을 경우 복통이 심해졌던 성필이는 유독 아침에 복통이 심해졌다. 저자는 성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수업 중에 실수를 한 다음부터 강박적으로 아침에 집에서 변을 보고 등교하는 버릇이 생긴 걸 알게 된다. 결국 당시의 두려움이 자리 잡아 몸에도 이상이 생기는 신체화장애를 일으킨 것이다.

저자는 이 외에도 다양한 사례를 제시한 후 나쁜 기억을 형성·강화하는 뇌와 감정의 작동 원리, 나쁜 기억을 만드는 행동의 심리적 원인 등을 폭넓게 소개한다. 그 중 다소 상반돼 보이는 ‘행동 편향’과 ‘부작위 편향’을 살펴보자. 행동 편향은 결과와 상관없이 뭔가 행동하는 것이 나아보이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책에선 1사 2루 상황보다 무사 1루 상황에서의 득점 기대값이 더 높지만 감독들이 자주 ‘보내기 번트’를 지시하는 것을 예로 든다. 앞의 사례에 대입한다면 변을 잘 보지 못하는 아이에게 뭐라도 해야 한다는 부모의 조급함과 이에 호응한 의사의 관장이 행동 편향의 예가 될 수 있다.

반대로 부작위 편향은 어떤 일을 하지 않아 발생하는 손해를 덜 나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다. 저자는 잘못된 연구 결과와 언론 보도가 확산되면서 ‘자연주의’를 표방한 추종자들이 백신을 거부하는 현상을 사례로 들고 있다. 이밖에 “생각이 너무 많아 생기는 문제로 본능을 잃게 되는 위축”과 “생각이 나지 않아 생기는 문제로 본능으로 돌아가는” 당황의 차이 같은 흥미로운 행동의 심리적 원인 등이 실제 및 영화적 사례와 함께 풍부하게 설명된다.

‘나쁜 기억’ 극복하기

다양한 심리학적 연구 결과를 통해 나쁜 기억이 형성·강화되는 배경을 살펴본 저자는 이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논의를 이어간다. 잊으려고 해도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 곳곳에 ‘알박기’를 해 문득문득 떠오르는 나쁜 기억을 두고 저자는 “자꾸 떠올라도 그냥 두자”고 주문한다. 회피하지 말고, 일단 부딪쳐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감각에 주의를 기울여 그에 따르는 감정을 이해하고, 그 감정을 일으킨 기억을 마주하는 자각의 과정이 치유의 핵심이라고 본 것이다. 이를 통해 나쁜 기억이 만들어진 맥락을 파악할 수도 있고, 문제의 원인이 자신일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이와 함께 가장 훌륭한 망각의 기술인 “좋은 경험하기와 좋은 기억으로 왜곡하기”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여행을 떠나자. 맛있는 음식을 음미해보자. 나를 힐링해 주는 책을 읽고 무엇이 좋았는지 글로 남겨보자. 친구를 칭찬해보자…이 모든 경험은 뇌의 영역 곳곳에 기억의 절편으로 남겨진다.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망각이 이루어질 것이다.” 책 마지막에 나오는 기억 분류법에서 저자의 의도는 보다 분명해진다. 저자는 우리의 기억을 평생 지니고 싶은 좋은 기억,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나쁜 기억, 나를 완성시키는 ‘좋은 나쁜 기억’으로 나눈다. 나쁜 기억을 그 자체로 두지 말고, 나를 완성시키는 ‘좋은 나쁜 기억’이 될 수 있도록 기억을 안아주자는 것이다.

책은 ‘작지만 확실히 나쁜 기억’을 핵심 키워드로 하고 있지만 인간 행동의 원인이 되는 심리학 일반에 관한 내용을 상당 부분 포함한다. 저자의 이력과 사례의 영향으로 아이를 둔 부모 입장에서 펼쳐 봐도 좋을 것 같다. 저자의 경험을 통한 치유 사례는 설득력을 높인다. 의사로서 저자의 성찰을 엿볼 수 있는 다음 문장 역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올바른 진단을 위한 임상적 추론은 지식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환자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심리학, 첨단 의료의 핵심이 되는 공학, 세상 살아가는 경제학 원리 등 다양한 지식과 경험이 의사에게 요구되며 이는 환자를 위해 그리고 사회를 위해 쓰인다. 이런 의사가 많아져야 사회가 건강해지는 것이다.”

김현길 기자 h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