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박혜진의 읽는 사이] 에세이, 작가의 사유·생활이 전면에 나서는 문학

입력 2020-12-03 19:30 수정 2020-12-03 19:30
김현진의 새 에세이는 자신의 위기와 가난에 솔직하다. 대물림된 가난, 직장에서의 갑질, 지속되는 우울증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 생활을 촉감이 도드라지는 에세이를 읽는 독자는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수전 손택의 대표작은 아무래도 에세이집이다. 예술과 예술사에 대한 통렬한 안목, 미국 주류 세계의 부조리와 폭력과 맞선 예리한 비판과 반체제적인 아우라, 지성의 세계 그 안쪽에 당당히 자리한 비평적 비전은 우리가 흔히 쓰는 용례로서의 ‘에세이’와 거리가 멀어 보인다.

실제 우리나라 출판 문화에서 그의 대표작 ‘해석에 반대한다’ ‘타인의 고통’ ‘사진에 관하여’ 등은 인문·예술 분야의 묵직한 도서로 분류된다. 이른바 산문 또는 에세이라는 유연하고 미끄러운 구역 안에서 손택과 같은 글은 이질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작가와 독자를 막론하고 우리에게 에세이란 글쓴이의 생활감을 공유하는 장르로 인식되는 듯하다. 생활감에는 그의 사유와 태도, 인식과 논리가 물론 포함되겠으나 그 외의 대부분은 사적인 영역에 가깝다. 우리는 많은 에세이에서 작가가 기억하고 쓴 작가의 삶 일부분을 공유한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그것은 어떻게든 윤색되고 변형되겠지만, 유려하면 유려한 글일수록 읽는 이는 에세이의 텍스트를 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허구의 탈을 쓴 소설과 진실’의 얼굴을 한 에세이가 벌이는 각축장이 있다고 치자. 에세이는 최소한 단기전의 승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진실은 빠르게 사무친다.

세계 지성계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던 손택 본인의 삶을 엿보기에 다니엘 슈라이버가 평전 ‘수전 손택: 영혼과 매혹’은 쏠쏠한 역할을 한다. 손택 특유의 방대한 에토스와 격렬한 파토스의 결합으로 인해 그의 에세이에서 그의 삶을 읽어내지 못한 독자에게 꽤 친절한 안내서가 되는 책이다. 동시에 이 책은 작가의 정신으로 우리를 다시금 안내한다. 손택의 유년기부터 생애 마지막 순간, 혹은 추모의 날들까지 다룬 이 매혹적인 평전을 읽고 손택의 저서 몇을 장바구니에 다시 담거나 책장에 꽂힌 그의 책을 다시 펼치지 않긴 어려울 것이다. 요컨대 이 책은 손택이 쓰지 않은 손택의 에세이 같다. 즉 손택의 생활감이 있다.


모두가 수전 손택이 될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에세이의 강력한 장점은 그 유연함에 있다. 이지적인 논리와 지성적인 직관이 생활감을 압도하는 책이 있는 만큼, 자기 고백과 막힘 없는 솔직함이 빛나는 에세이도 충분한 매력이 있다. 에세이 작가 김현진의 최근작 ‘내가 죽고 싶다고 하자 삶이 농담을 시작했다’를 손택 평전에 붙여서 읽었다. 세계적 명성을 가진 영어권 에세이 작가가 자신의 지성과 신념에 솔직했다면 그보다는 덜 알려진 한국의 에세이 작가는 자신의 위기와 고난에 솔직하다. 대물림된 가난과 충분히 받지 못한 사랑, 꼬여 버린 가계의 경제와 직장에서의 갑질, 그리고 지속되는 우울증 들을 김현진 작가는 날것대로 쓴다. 게다가 김현진에게는 손택에게는 별로 없는 것이 있다. 그의 글은 유난히 유머러스하다. 생활감이 있는 유머 뒤편에는 늘 몸을 움츠린 고귀함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김현진의 에세이는 고귀하기까지 하다. 그의 생활감이 그의 글을 그렇게 만든다.

어떤 작가는 이라크전쟁의 상흔이 담긴 사진에서 글을 시작한다. 어떤 작가는 무너져내린 쌍둥이빌딩의 잔해에서 글쓰기를 착수하기도 한다. 이곳의 어떤 작가는 정신 병동의 벽에서 글을 시작할 수 있다. 그 작가는 아버지의 무능과 폭력과 죽음을 쓸 수 있으며 또한 그 작가는 페미니즘과 세대론을 다룰 수 있으며 금치산자와 소수자의 삶도 글로 남길 수 있다. 거기로부터 우리는 우리의 감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에세이는 작가의 사유와 생활이 전면에 나서는 문학이다. 최근 우리 곁의 에세이는 사유보다는 생활에 가까운 듯하나, 사실 잘 된 에세이는 그 둘의 경계가 무의미하다. 사유는 생활을 생각하게 하고 생활은 사유를 움직이게 한다. 읽는 행위 자체가 희소한 취미로 여겨지는 요즘, 에세이는 장르로서 도리어 한창 각광 받는 중이다. 누구나 자신의 채널을 가질 수 있고, 자신의 취향을 드러낼 수 있으며 자신의 생활을 공유할 수 있는 요즘이 에세이의 시대인 듯하다.

지성의 넓이와 깊이가 돋보이는 에세이에서부터 생활의 질감과 촉감이 확연한 에세이에 이르기까지, 글은 유연하게 유려하게 세계 곳곳을 비춘다. 거기에 비치는 자신을 발견할 기회는 읽는 사람에게 열려 있을 것이다.

서효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