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대기업의 인사가 시작됐다. 코로나19 영향으로 예년보다 조기에 정기 임원 인사를 단행하는 추세다. 신속한 인사로 미래 사업 계획을 선제적으로 수립해 경영 환경의 불확실성을 낮추겠다는 판단이다.
올해 대기업 인사의 특징은 ‘정중동’으로 요약된다. 깜짝 인사 대신 안정적인 경영 환경을 유지한 채 점진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60대 최고경영자(CEO) 대신 50대 CEO를 내세워 젊은 기업을 만들고 여성 임원을 늘려 유리천장을 깨는 식이다. 다만 오너가 3, 4세들이 경영 전면에 나서는 세대교체 바람은 눈에 띄는 변화다.
삼성전자는 지난 2일 김기남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장, 김현석 소비자가전(CE) 부문장, 고동진 IT·모바일 부문장을 유임하는 인사를 발표했다. 기존 3명의 CEO를 모두 유임해 불확실한 글로벌 경영 환경을 극복하겠다는 방침이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삼성, LG, 한화, 롯데 등은 50대 CEO 선임 등을 통해 젊은 기업 만들기에 나섰다. 성장사업의 추진을 위해 젊은 인재를 과감히 발탁했다는 게 공통적인 설명이다.
내년부터 삼성디스플레이를 이끄는 최주선 신임 사장은 올해로 57세다. 최 사장은 지난 1월부터 삼성디스플레이사업부장을 맡아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주목받는 퀀텀닷(QD) 디스플레이 개발을 이끌어 왔다.
하현회(64) LG유플러스 부회장이 지난달 25일 용퇴를 결정하면서 황현식(58) LG유플러스 사장이 신임 CEO로 선임됐다. 이로써 권봉석(57) LG전자 사장, 정호영(59) LG디스플레이 사장 등 LG 그룹 주요 계열사의 CEO는 모두 50대가 됐다. LG는 올해 45세 이하 신규 임원을 24명 선임하는 등 젊고 추진력 있는 인재들을 전진 배치했다.
한화는 40대 대표이사 발탁을 통해 계열사 CEO 평균 연령을 58.1세에서 55.7세로 2.4세 낮췄다. 변화와 혁신의 속도를 가속화하기 위한 한화그룹의 의지를 반영했다는 평이다.
롯데칠성음료를 이끌게 된 박윤기 신임 CEO와 강성현 롯데마트 신임 CEO도 50세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이번 인사를 “시장의 니즈를 빠르게 파악하고 신성장 동력을 적극적으로 발굴해낼 수 있는 젊은 경영자를 배치해 위기를 타개하겠다는 신동빈 롯데 회장의 의지”라고 설명했다. 롯데는 이와 함께 승진 및 신임 임원 수를 지난해 대비 80% 수준으로 줄이면서 조직 슬림화를 이뤘다.
여성 임원도 대거 등장했다. LG 그룹은 여성 임원 확대 기조를 이어가 올해는 역대 최다인 15명의 여성 임원 승진을 발표했다. 전무 승진 4명, 신규 임원 선임 11명 등이다. LG그룹 전체 임원 중 여성 임원의 비율은 2018년 말 3.2%에서 올해 말 5.5%로 높아졌다. 특히 김희연 LG디스플레이 전무, 여명희 LG유플러스 전무, 김새라 LG유플러스 전무의 승진으로 LG디스플레이와 LG유플러스는 첫 여성 전무를 배출하게 됐다.
한화그룹도 김은희 한화갤러리아 기획부문장을 한화역사 대표이사로 발탁하면서 그룹 내 첫 여성 CEO의 등장을 알렸다. GS그룹은 박솔잎 GS홈쇼핑 전무를 외부에서 영입하면서 성별을 가리지 않는 능력 중심의 인사를 발표했다.
오너 일가의 세대교체도 진행 중이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 한화솔루션 전략부문 대표이사 사장은 지난해 9월 부사장으로 승진한 지 1년 만에 사장으로 승진했다. 김 회장의 차남인 김동원 한화생명 최고디지털전략책임자(CDSO)도 전무로 승진하면서 한화그룹 3세가 경영 전면에 등장하는 모양새다.
허철홍 GS칼텍스 전무는 2017년 11월 상무로 승진한 지 3년 만에 전무로 승진했다. 허 전무는 고 허준구 LG건설 명예회장의 아들인 허정수 GS네오텍 회장의 장남이다. 허세홍 GS칼텍스 사장, 허윤홍 GS건설 사장, 허준홍 삼양통상 대표 등과 함께 GS그룹 일가 4세로 묶인다.
LS그룹에서는 선임 열흘 만에 자진 사임했던 구본혁 예스코홀딩스 부사장이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CEO로 재선임됐다. 구자명 LS니꼬동제련 회장의 장남인 구 신임 CEO는 지난 1월 예스코홀딩스 대표이사에 선임됐다. 당시 구 사장은 LS그룹 3세 가운데 처음으로 계열사 대표에 올라 주목받았지만 경영수업을 더 받겠다며 자진 사임했다.
이웅열 전 코오롱그룹 회장의 장남인 이규호 코오롱인더스트리 FnC부문 최고운영책임자(COO) 전무도 부사장으로 승진해 코오롱글로벌의 자동차 부문을 맡게 됐다.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장남인 정기선 현대중공업지주 부사장의 사장 승진 가능성도 거론됐으나 지난달 19일 현대중공업지주 정기 인사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인사를 앞둔 현대차 등도 주요 계열사 CEO를 유임하는 내용의 인사를 발표할 것으로 전망된다. 안정적인 경영 환경 확보가 코로나19 사태 상황에서는 최우선이라는 이유다.
현대차그룹은 통상 주요 그룹 가운데 거의 마지막에 인사를 발표했다. 지난해에도 12월 27일 명단을 공개했다. 재계는 이달 중순 이후 인사가 이뤄질 것으로 전망했다. 이번 인사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지난 10월 취임 이후 첫 연말 인사다.
권민지 기자 10000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