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시대다] 가볍고 쿨하게, 그리고 감각적으로

입력 2020-12-05 04:02
편의점 진열장을 스치듯 걸어가며 물건을 담는 여자는 거침이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브랜드는 명확했고, 가격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었다. 빨간색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그녀는 외국어에 능통했고, 컴퓨터를 다루는 실력 또한 출중했다. 밥보다는 빵이나 스테이크를 좋아했고, 커피는 원두커피를 마셨다. 주말에는 남자친구와 한강 공원에서 자전거를 탔고, 집에는 앤서링 머신이 부착된 전화기가 있어 부재중 전화를 놓치지 않았다. 출근할 때는 같은 옷을 연거푸 입는 날이 없었고, 걸을 때마다 경쾌한 구두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곤 했다.

기적처럼 가난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여유를 갖게 되었던 1990년대의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 앞에 다가온 풍요를 즐기고 뽐내고 싶어했다.

드라마 ‘질투’는 오랜 친구 사이에서 연인이 되는 영호(최수종)와 하경(최진실)을 포함해 신세대 젊은이들의 우정과 사랑을 그렸다. 한국 최초의 트렌디 드라마로, 동시대 유행을 이끌었다. 극중 인물들이 자주 찾았던 편의점과 피자집 등이 호황을 맞는 등 외식 산업과 유통에 영향을 끼쳤다. MBC 제공

MBC 드라마 ‘질투’(1992)는 그런 흐름 속에서 탄생한 한국 최초의 트렌디 드라마였다. 이영호(최수종)와 유하경(최진실)의 우정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갈등은 있되 심각하지 않았고 고민은 있지만 무겁지 않았다. 만나고 헤어지고 싸우고 화해하는 이들의 일상은 마치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주문하듯 머뭇거림 없이 신속했고,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아도 주문을 취소하듯 쉽게 지워버릴 수 있었다. 사랑도 일도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결과에 연연하지 않으니 모두 행복했다. 그것이 트렌디한 것이었다.

신세대의 사랑과 우정 보여주다

영호와 하경은 어린 시절부터 친한 친구 사이다. 서로를 이성으로 생각해 본 적 없는, 말 그대로 남자 사람 친구, 여자 사람 친구이다. 영호는 연극을 보러 갔다 만난 한 살 연상의 한영애(이응경)와 사귀는 사이이고 하경은 과외선생님이었던 민상훈(이효정)을 인생의 멘토처럼 의지하고 따랐다. 하경의 절친인 배체리(김혜리)는 상훈의 비서인데 상훈을 볼 때마다 마음이 설렜고, 영호의 클라이언트인 조성수(임청하)는 알고 보니 영애의 옛 연인이었다. 영호와 영애의 사랑은 지루한 진행형이었고 상훈에 대한 하경의 감정은 긴가민가 수준이었다.

일보다는 결혼이 우선이었던 체리는 상훈에 대한 감정이 명확했지만, 이미 끝난 사이임에도 영애를 잊지 못하는 성수의 감정은 사랑과 집착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질투’는 이렇게 하경과 영호를 중심으로 얽혀있는 애정 관계라는 면에서 보통의 드라마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달랐다. 빠른 경제성장은 풍요로운 일상을 약속해 주는 듯했고, 누구에게나 더 많은 기회를 보장해줄 거라는 희망을 품게 했다. 선택의 폭이 넓어졌으니 실패했다고 좌절하지 않아도 되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뒤집히면서 기존의 가치들이 바뀌듯 사랑과 일도 그렇게 바뀌었다. 만남과 헤어짐은 항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고, 이별은 상처가 되긴 했지만 빨리 잊혔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사는 것도 좋지만 이혼이 주홍글씨가 되진 않았다. 평생직장은 구태의연해 보였고 자신의 가치를 높여 이직하는 것이 능력 있는 사람의 처세였다.

드라마는 사랑과 일에 대해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고민이 적으니 전개는 빨랐고 대사는 간단명료했다. 슬픔마저도 빠른 회복력을 갖고 있으니 구질구질한 청승이 끼어들 틈은 어디에도 없었다.

영호는 영애가 성수와 동거까지 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어쩜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까 싶을 만큼 마음의 동요를 내색하지 않았고 영애도 자신의 과거 때문에 영호 앞에서 전전긍긍하지 않았다. 결혼 생각은 없다면서도 영애를 계속 만나는 영호를 지켜보던 하경은 우정과 사랑 사이를 넘나드는 것에 시들해질 즈음 해외 연수를 떠났다. 영애를 질투했던 시간이 있었나 싶게 그녀의 발걸음은 경쾌했다. 체리와 상훈의 관계를 뒤늦게 알게 되었을 때도 하경은 두 사람에게 배신당한 듯 속상해 했지만 금방 툭툭 떨고 이들의 결혼을 축하해 주었다. 사랑이 마음대로 된다면 좋겠지만 매달리진 않았다. 사랑이 끝났다고 세상이 끝난 것도 아니니 다시 또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 그렇게 그들에게 사랑은 쿨했다.

쿨한 사랑으로 말하자면 하경의 엄마가 더 앞서갔다. 신문기자인 남편과 뜨겁게 사랑해서 결혼했고, 특파원이 된 남편과 함께 가족 모두 미국에서 살기도 했다. 모든 것이 순탄했듯 이혼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실패한 자신의 결혼 때문에 좌절하지 않았고 오히려 소설가인 자신의 직업에 더 충실했다. 드라마 작가로, 문화센터 강사로 활동 영역을 넓혀가며 하경과 숨김없는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이상적인 신세대 엄마의 전형이기도 했다.

‘질투’는 직업도 시대를 앞서갔다. 하경은 여행사 직원이었고 영호는 광고대행사 직원이었다. 변하는 세상을 빠르게 따라잡아야 했고, 누구보다도 세련된 감각과 차별화된 기획력이 필요했으며 조직의 원칙보다는 개인의 개성으로 더 빛날 수 있었던 이들의 일은 어딘가 멋있어 보였다. 똑 부러진 일 처리로 자신의 경력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당찬 신입사원 하경은 남자 직원들의 시기와 질투를 한몸에 받았지만 400대 1의 경쟁을 뚫고 해외연수생으로 선발됨으로써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었다. 결혼하면 퇴사하겠다는 각서를 쓰고 입사하고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업무와 상관없이 유니폼을 입어야 했던 수많은 직장 여성들에게 하경은 ‘워너비 워킹우먼’ 그 자체였다.

비록 외삼촌이 운영하는 법률회사에 낙하산으로 취업했지만 정보를 빼가는 전임 비서를 현장에서 막아냈고 각종 국제 업무 지원까지 나름 열심히 일했던 체리, 여의도에서 피자 체인점을 운영하는 영애, 국제변호사인 상훈, 소설가이자 드라마 작가인 하경의 엄마, 그녀와 호흡을 맞추는 방송사 PD 등 모두 젊은 층이 선호하는 직업이었다. 업무에서 오는 고단함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일은 항상 흥미로웠고,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그렇게 ‘질투’는 획일적인 기성세대의 문화를 거부하며 자신들만의 자유로움을 추구했던 70년대 전후에 출생한 신세대들의 취향을 정확히 담아냈다.

트렌디 드라마 짧고 화려한 전성기

트렌디 드라마는 극 중 등장인물들의 일상생활을 통해 동시대의 유행을 이끌어갔다. 편의점과 피자집이 매회 빠지지 않고 등장하면서 외식산업과 유통점 판도 변화를 불러오기도 했던 ‘질투’는 해당 기업의 상호가 그대로 드라마에 등장하면서 간접광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최고 시청률 56.1%(닐슨코리아)에 힘입어 브랜드 인지도는 동반 상승했고, 필요에 의한 소비가 아니라 즐기기 위한 소비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주었다.

소비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트렌디 드라마는 이미지에 집중하며 감각적 영상을 만들어냈다. 끊임없이 볼거리를 만들어냈던 ‘질투’의 백미는 엔딩씬이었다. 해외 연수에서 돌아온 하경이 다시 미국으로 떠나겠다고 하자는 영호는 더이상 질투하기 싫다며 하경에게 자신의 진심을 고백했고, 그런 영호에게 하경은 처음으로 사랑한다 말했다. 우정과 사랑 사이를 오가던 긴 줄다리기가 끝나는 순간 그들은 서로 껴안고 입맞춤을 했다.

이들을 중심에 두고 360도 회전하는 카메라는 마치 놀이기구에 올라탄 듯 빠르게 회전하며 이들의 사랑을 축복해 주었다. 카메라는 몇 바퀴 회전하다 멀어지면서 제작 현장 전체를 보여주었는데 이 또한 기존의 드라마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장면이었다. 그만큼 ‘질투’는 평범한 모든 것을 다르게 보려 했던 새로운 시도이기도 했다.

출생의 비밀, 사랑과 배신, 복수와 용서 등으로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왔던 멜로 드라마와 달리 젊은 주인공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사랑과 독특한 라이프스타일을 그려낸 ‘질투’의 성공은 ‘파일럿’, ‘마지막 승부’, ‘사랑을 그대 품 안에’ 등으로 이어지면서 트렌디 드라마의 붐을 일으켰다. 도시 공간에서 이뤄지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는 세대나 가족 간 갈등에 대한 구체적 이야기 없이도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연애담에 공감할 수 있었지만 소재의 차별화를 위해 신데렐라 스토리나 캔디 스토리로 확대되어가면서 ‘질투’를 비롯한 일련의 트렌디 드라마가 갖고 있던 일상성과 경쾌함은 희미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90년대 말 외환위기는 더이상 가볍고 쿨하고 감각적인 일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짧았던 영광이지만 그래도 트렌디 드라마는 자기감정에 솔직했던 신세대들의 한낮의 꿈이었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