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주간 출판전문지 ‘기획회의’는 2019년을 결산하면서 한 해를 대표하는 키워드로 ‘주류가 된 장르’와 ‘기성문단의 몰락’을 함께 꼽았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언론은 해마다 연초에 ‘거장들의 귀환’이라거나 ‘간판급 작가들의 역작’이 쏟아진다는 기사를 경쟁적으로 발표했지만 늘 연말이 되면 성적이 초라했다. 잘 팔리는 작품이 반드시 좋은 작품인 것은 아니지만 종합 베스트셀러 100위 안에 한국소설이 한두 종 들어가기도 버거웠다. 2010년대만 해도 해마다 한국소설 밀리언셀러가 등장하던 것에 비하면 참담한 성적이 아닐 수 없었다.
한 출판평론가는 이런 현상을 언급하면서 한국문학이라는 산에 불이 나서 새까맣게 타버렸다고 말했다. 이렇게 된 연유가 무엇일까. 무엇보다 우리 출판이 너무 팔리는 작가들에게만 집중하면서 신인을 키우지 못한 탓이 컸을 것이다. 그리고 주례사 비평, 표절, 성추행 등 우리 문학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논란이 끊임없이 터졌다. 독자가 정을 주고 싶어도 도저히 줄 수 없을 만큼 논란이 이어졌다.
올해는 어떨까. 연초에 문학상 논란으로 시끄럽긴 했다. 그러나 예년과 달리 올해에는 연초에 거론됐던 작가 중에서 몇 작가는 좋은 성적을 얻었다. 장르소설 강세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던 순수문학이 반전을 이루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교보문고는 올가을에 한국소설 판매가 작년보다 30% 이상 늘고, 정점을 찍었던 2012년과 비교해도 4.3% 더 많이 팔렸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교보문고는 잘 팔리는 책들의 공통 키워드로 ‘청소년소설’ ‘SF소설’ ‘신진작가’들을 제시하면서 세 키워드야말로 한국소설의 새로운 원동력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이 분위기를 선도한 것은 손원평 장편소설 ‘아몬드’(창비)로 이미 65만부나 판매됐다. ‘한 도시 한 책’이나 ‘한 학기 한 책’에 가장 많이 선정된 것은 공감 불능 사회에 청소년과 어른이 함께 읽으면 좋을 것이라는 판단이 크게 작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형 영어덜트’의 탄생을 알린 이 소설은 작년(14만부)보다 올해에 2배 가까이 팔렸다. 인공지능이 일상이 된 시대가 되면서 우리 사회가 ‘학력 사회’에서 ‘학습력 사회’로 가파르게 옮아가고 있는 데다 때마침 코로나19로 ‘집콕 독서’가 일상이 되면서 어른과 청소년이 소설을 함께 읽고 토론을 벌이며 상상력을 키워가기에 맞춤한 책이기에 ‘아몬드’가 크게 부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가장 인기를 누린 작가는 정세랑이다. 그가 올해 6월에 펴낸 신작 ‘시선으로부터’(문학동네)도 반응이 좋았지만 2015년 12월 출간돼 꾸준히 사랑받아 온 ‘보건교사 안은영’(민음사) 원작의 드라마가 올해 넷플릭스에 상영되면서 ‘피프티 피플’(창비) ‘지구에서 한아뿐’(난다) 등 그의 전작들까지 모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의 소설들은 페미니즘이라는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SF라서 젊은 세대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평가다.
신인작가로 가파르게 성장해가고 있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의 김초엽과 정세랑은 장르와 순수문학의 양 진영에서 ‘우리 작가’라고 우길 정도로 경계를 잘 넘나들고 있다. 지금 아동문학이나 청소년문학에서 인기를 끄는 소설들은 대부분 SF를 비롯한 장르소설이기에 미래에 어떤 소설이 인가를 얻을 것인지는 이미 대세가 결정됐다.
지난 몇 년간 신진작가들이 새까맣게 타버린 한국문학이란 산에 화전을 일구며 각자의 나무를 심은 결과 이제 그 산은 다시 푸르러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년이 더욱 기대된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