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진 것처럼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에 참전했던 오디세우스의 20년에 걸친 귀향 과정을 그린 모험서사다. 그런데 호메로스는 집을 향해 가는 오디세우스의 힘든 여정을 자세히 그리는 한편 그가 가야 할 집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도 상당히 공을 들여 기술한다.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가기 위해 바다에서 사투를 벌이는 동안 그의 가족 역시 그에 못지않은 고생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것일까. 오디세우스 아내 페넬로페는 구혼자들에게 시달리고, 아들 텔레마코스는 살해 위협을 받는다.
페넬로페에게 구혼하는 남자들 이야기는 읽을 때마다 의아한 생각을 갖게 한다. 오디세우스가 전쟁이 끝나고 한참 지났는데도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죽었을 거라고 단정할 수 있고, 그러니 아름다운 미망인 왕비에게 청혼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이상하지 않다. 그 수가 100명이 넘었다는 건 좀 놀랍지만 그렇다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많은 청혼자들이 모두 페넬로페 집에 눌러앉아 먹고 마시고 떼를 쓰고 위협하고 난동을 부린다는 건 얼른 이해되지 않는다.
의아함은 구혼이라는 호의적 동기와 난동이라는 적대적 행동 사이의 부조화에서 비롯한다. 구혼하는 사람의 마음보다 더 낮은 마음을 나는 알지 못한다. 구혼자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를 취하는 사람이다. 외부 압력이나 심리적 압박감 없이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는 유일한 순간이 구혼할 때이다. 구혼자는 자기를 내주는 사람이고, 내주겠다고 약속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은 무릎을 꿇는 대신 윽박지르고 협박한다. 진치고 앉아 먹고 마시며 재산을 탕진한다. 이들의 마음은 높고 행동은 거칠다.
가장 아름다운 일인 구혼이 가장 추악한 난동이 돼 있는 이 현상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나는 그것이 구혼, 혹은 구혼을 하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간주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애써 다른 가능성을 추측해본다. 구혼의 동기는 사랑이다. 물론 사회를 유지시키는 중요한 제도인 결혼이 사랑에 의해서만 이뤄진다고 하는 건 순진한 생각이다. 그렇지만 사랑이 결혼의 중요한 동기라는 걸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동기가 사랑일 때 구혼자는 낮아진다. 사람을 낮아지게 하는 것은 사랑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예컨대 그 사람의 성품이나 신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이 그렇게 무례하고 난폭하게 행동하는 것은 그들에게 사랑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구혼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 안에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들의 위협과 협박, 꼴불견과 추악함을 다르게 추측할 수 없다.
구혼의 대상을 배려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타당하다. 일반적으로 구혼자는 구혼하는 대상에게 온통 집중해 있기 때문에 자기는 거의 제로가 된다. 구혼하는 주체는 주체로서의 지위를 전혀 갖지 못한다. 누가 빼앗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내려놓기 때문이다. 내려놓은 이 지위는 상대방에게 양도된다. 이 자발적 포기와 양도로 말미암아 구혼자는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그러나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은 자기 지위를 내려놓지 않는다. 그들은 구혼의 대상이 아니라 구혼하는 자신에게 온통 집중해 있다. 그들이 의식하는 것은 구혼해 마침내 취득하게 될 자신의 지위와 이득이지 페넬로페가 아니다. 그들은 페넬로페를 향해 구혼의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추구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의 이익이다. 그들의 뻔뻔함과 후안무치를 다르게 설명할 수 없다.
여러 가지 이유로 화나고 우울한 연말이다. 구혼자라는 이름을 앞세운 이들에 의해 자행되는 뻔뻔하고 추악한 난동을 목도해야 하는 페넬로페의 심정이 이럴까. ‘오디세이아’의 결말을 알고 있다고 해서 위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집주인이 돌아온 뒤 그 추악한 구혼자들이 맞게 되는 파국을 큰 소리로 읽으며 힘들게 화와 우울을 다스려야 하는 처지가 참 딱하다.
이승우 (조선대 교수·문예창작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