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내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

입력 2020-11-30 04:04

얼마 전 읽은 기사 중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제가 인터뷰한 이들 대부분 말미에 ‘내 얘기 들어줘서 고맙다’고 하더군요.”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는 말에 지난해 이맘때 읽었던 책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동네 여자들이 밤마다 여자 셋만 사는 저자의 집에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저자는 어린아이였고 아빠는 도회지에서 다른 사람과 살았다. 할아버지도 세상을 일찍 떠났다.

혼자인 엄마를 위로할 겸, 사랑채가 비어 있는 집의 자유를 만끽할 겸 여자들은 밤마다 집을 찾아왔다. “잠이 안 와서, 달이 밝아서, 입이 궁금해서.” 밤마실에 여러 이유를 댔지만 대개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이들이었다. 모두 밤마실 자리에 주전부리감을 들고 왔다. 배추 한 뿌리나 볶은 콩, 튀긴 쌀 등이었다. 이 중 배추가 가장 푸짐했다. 추운 날 배추는 달뿐 아니라 살짝 고소하고 은은하게 매콤한 맛도 있단다. 물을 끓여 날배추를 데치고 배춧잎에 밀가루를 입혀 솥뚜껑에 배추적을 부쳤다. 저자 김서령은 에세이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에서 배추적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은 이들은 모두 외로움에 사무쳐본 여자들이었다고 기억했다.

이 여인들은 외로운 아낙의 집에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배추적을 먹으면서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위로했던 것 같다. 진심으로 공감하면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이 타인에 대한 배려나 사랑이 있을 때 가능하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한다. 우리 사회 많은 이들이 자기 얘기를 하는 데 몰두하고, 파편화된 삶의 방식에 익숙해지는 것처럼 느껴져서 일 것이다.

지금은 경청이 필요한 시간이다. 연초부터 이어진 코로나19로 사회적 단절이 커졌다. 서울대 보건대학원의 ‘코로나와 사회적 건강’ 설문에 따르면 지난 8월 말 코로나 관련 감정 1위는 ‘불안’이었다. 50%에 육박했다. 2위는 분노(25.3%), 3위는 공포(15.2%)였다. 사람을 만나고 얘기를 나누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 주기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내 얘기를 하고 싶은데 할 기회도, 사람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이런 부정적 감정이 누적되는 듯하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사회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 1년 동안 자살 충동을 느낀 사람은 5.2%로 집계됐다. 2년 전보다 0.1% 포인트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 여파가 반영된 여러 사회 지표를 근거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라는 암울한 예측을 하고 있다.

우울과 불안 속에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지인의 얘기다. 그는 한두 달에 한 번씩 의례처럼 배우자의 이야기 듣는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일상에 지친 배우자는 힘든 부분을 하염없이 토로한다. 내용은 비슷하다. 하지만 그는 항상 처음 듣는 것처럼 진지하게 듣는다. 긴 이야기가 끝날 때쯤 배우자의 표정은 한결 밝아진다. 마무리는 항상 이렇다고 한다. “내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

얘기를 집중해서 들으면 이렇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주변 사람들은 올해가 어땠냐는 질문에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코로나로 인해 세웠던 계획에 따라 시간을 보낸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 속에 불안해하고 제한된 생활공간 안에서 우울감을 느꼈다. 국가트라우마센터에 따르면 코로나 관련 상담 건수(9월 말 기준)는 확진자와 그 가족이 2만1700여건, 자가격리자와 일반인은 47만여건이었다. 내 가족이나 지인도 올해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연말이다. 지난 시간이 어땠는지 얘기 나눠보자.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다. 어쩌면 코로나 속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심리적 방역이다.

강주화 산업부 차장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