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동안 지속돼 왔던 영남 유림들의 ‘위패 서열 갈등(병호시비·屛虎是非)‘이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됐다.
경북도는 20일 호계서원 복설추진위원회가 주최하는 ‘호계서원 복설 고유제’에 이철우 지사가 초헌관으로 참석한다고 19일 밝혔다. 고유제는 호계서원의 복원소식을 알리고 영남 유림의 대통합과 지역의 정신 문화 발전을 기원하는 자리다.
호계서원은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한국국학진흥원 부지 내 1만㎡에 13동의 건물을 보유한 경북 유형문화재 제35호다. 1575년(선조 8년) 백련사 옛터에 여강서원으로 창건된 뒤 1676년(숙종 2년)에 호계서원으로 개칭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됐고, 7년 뒤 강당만 새로 지은 채 남겨졌다가 1973년 안동댐 건설과 함께 지금의 임하댐 아래로 옮겨졌다.
댐 건설과 함께 물보라와 습기로 서원건물 훼손이 우려되자 지역 유림과 서원 복설추진위에서 공의를 모아 복원을 요청했다. 경북도는 2013년 15억원의 예산으로 이전사업을 추진했고 2017년부터 50억원을 들여 복원 사업을 진행해 지난해 12월 준공했다.
복설 고유제를 가지는 호계서원의 가치는 ‘화해’로 요약된다. 호계서원에는 안동의 내로라하는 두 가문의 400년에 걸친 갈등과 화해의 사연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호계서원의 시작은 퇴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퇴계가 세상을 뜨자 안동의 퇴계 제자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의 후손들은 안동 여강서원에 따로 퇴계를 모시기로 했다. 안동 한복판에 아흔 두 칸으로 지어진 여강서원은 당시 영남에서 가장 큰 서원이었다. 서원은 훗날 이름을 호계서원으로 고쳐 달았다.
여강서원에 퇴계를 모시기로 했지만 제자 류성룡과 김성일의 위패를 어떻게 배치해야 하느냐가 문제였다. 류성룡 후학들은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이 관찰사로 마감한 김성일보다 벼슬이 높았으므로 상석(上席)인 동쪽을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성일의 후학들은 생년이 빠른 김성일이 류성룡보다 4년 선배이므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맞섰다.
양 가문은 영남학파로 예학에 정통한 우복 정경세에게 자문을 구했고, 정경세는 ‘나이가 아니라 관직 순’으로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두 가문의 학맥이 분파하면서 서열 문제는 퇴계 적통에 대한 시비로 이어졌고 갈등은 격화됐다.
‘병호시비’(屛虎是非)라는 이름까지 붙여지면서 안동 유림을 둘로 갈라 놓았다. 병호시비에서 ‘병’(屛)은 류성룡을 배향한 병산서원을, ‘호’(虎)는 김성일 학맥이 장악한 호계서원을 이른다.
갈등이 깊어지고 호계서원의 사당이 사라지면서 호계서원에 있던 퇴계의 위패는 도산서원으로 갔다. 류성룡의 위패는 병산서원으로, 김성일의 위패는 낙동강변의 임천서원으로 옮겨졌다.
이후 흥선대원군은 안동부사를 불러 해결방안을 모색하도록 지시했다. 양쪽 유림 1000여명이 모였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격분한 대원군은 양 학맥의 입장을 대변한 책 한 권씩을 골라 목판과 판본을 태우고 호계서원을 철폐하는 것으로 불씨를 묻었다.
병호시비는 지난 2009년 양 문중이 나서면서 해결의 전기를 맞았다. 문중 대표가 ‘류성룡 왼쪽, 김성일 오른쪽’이란 위패 위치를 합의하면서 끝나는 듯 했다. 하지만 안동 유림들이 학파 간에 결론 내야 한다고 나오면서 대립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4년 뒤인 2013년, 마침내 화해가 이뤄졌다. 지난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해 임하면의 공원에 옮겨진 뒤 쇠락해 가고 있던 호계서원의 복원을 추진하던 경북도가 두 가문과 학맥에 중재안을 냈다.
류성룡을 퇴계 위패의 동쪽에, 김성일을 서쪽에, 그 옆에 김성일의 후학인 이상정을 배향하자는 제안이었다. 한쪽에는 높은 자리를, 다른 한쪽에는 두 명의 자리를 보장하는 화해안이었다. 양 학파는 이에 동의해서 400년에 걸친 병호시비는 결국 마침표를 찍었다.
이철우 경북지사는 “호계서원의 복설은 영남 유림들의 대 통합을 통해 이뤄낸 성과”라며 “화합, 존중, 상생의 시대를 열어가는 경북 정신 문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안동=김재산 기자 jskimkb@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