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2주가 지난 지금 미국은 미래에 대한 낙관보다는 비관에 휩싸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유는 일단 대선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을 더 무겁게 만드는 건 트럼프 시대가 이대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다.
올해 미국 대선은 여러모로 기록적이었다. 역대 최고의 투표율을 기록했고, 조 바이든 당선인은 역대 최다인 7880만표 이상을 얻었다. 그렇지만 압승은 못 됐다. 트럼프에게 투표한 사람도 7300만명이 넘었다. ‘트럼프 시대 4년을 겪고도 그에게 또 표를 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말은 철모르는 얘기였다. 결과는 미국 유권자의 거의 절반이 트럼프에게 표를 준 것으로 나타났다. 트럼프의 득표는 4년 전 대선 당시 6300만표보다 1000만표 이상 더 늘었다. 트럼프 지지는 더 견고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를 몰아낸 사람들은 승리를 축하할 틈도 없이 4년 후 다시 7300만명이란 숫자와 맞서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트럼프를 찍은 7300만명’이 대선 이후 미국 정치의 주제로 떠오른 이유도 여기 있다. 이 문제에 대해 바이든이 꺼내든 카드는 통합의 리더십이다. 바이든은 승리 선언 연설을 하면서 통합과 치유를 약속했다. 바이든은 트럼프의 대선 불복에 대해 고작 “당황스러운 일”이라고 말했을 뿐 비난하지 않았다. 트럼프를 기소하는 문제에 대한 질문에는 “매우 매우 특별한 일이며, 민주주의에 그렇게 좋은 일도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미국의 정상화를 핵심 과제로 설정한 바이든은 통합과 치유라는 키워드가 갈라진 사회를 이어붙이는 접착제가 될 것으로 믿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이며 불가능한 목표라는 비판도 듣고 있다. 바이든의 통합론에는 이런 질문들이 따라붙는다. 트럼프의 유산을 청산하지 않아도 되는가. 트럼프와 함께 범죄적 행위에 가담한 사람들을 내버려 둬야 하는가. 한 번 경험한 비극을 다시 경험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불필요한가.
트럼프를 찍은 7300만명을 ‘가짜뉴스에 속는 사람들’로 규정하고, 사회 분열의 책임을 가짜뉴스에 돌리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지난 16일 BBC 인터뷰가 대표적이다. 오바마는 미국이 4년 전보다 더 심하게 분열됐다면서 그 주된 원인으로 트럼프의 편 가르기 정치와 함께 “사실이 중요하지 않은 온라인상의 잘못된 정보의 확산”을 꼽았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 역시 ‘진실만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구할 수 있다’는 제목의 글에서 “미국 대중의 거의 절반이 속기 쉬운 것으로 판명됐다”며 “리더와 뉴스 제공자들이 제재 없이 거짓말을 퍼트릴 자유를 느낀다면 자유 사회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트럼프를 찍은 7300만명을 경제적 불평등이나 지역 간 격차에 대한 분노, 엘리트 중심 주류 정치에 대한 반대로 이해하려는 시각도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버니 샌더스, 엘리자베스 워런,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등 민주당 내 좌파그룹이 이 같은 견해를 대변하고 있다. 이들은 민주당이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트럼프 현상’의 원인이라며 당을 분배 쪽으로 견인하고자 한다.
트럼프는 어쨌든 떠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를 찍은 7300만명은 남는다. 바이든 정부 4년은 이들 7300만명과의 대화, 투쟁, 합의의 시간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트럼프 시대의 종식이냐 부활이냐를 결정할 것이다.
김남중 국제부장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