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신의 속삭임을 듣고 있는가

입력 2020-11-18 04:02

“다리가 긴 새들은 애초에 비행이 존재의 목적이 아니라는 듯 뜻밖의 기품을 자랑하며 일제히 날아오른다.” 델리아 오언스의 ‘가재가 노래하는 곳’ 첫머리에 나오는 문장이다. 이러한 문장은 읽는 사람을 기쁘게 한다. 마법 같다. 생각을 빨아들이고 존재의 의미를 질문하며, 사유를 확장하고 상상을 작동시킨다. 새는 날려고 존재하지 않는다. 벌레를 잡고 고기를 먹어 유전자를 이어가기 위해 날개를 펼치는 게 아니다. 난다는 것은 타고난 역능이나 유전적 프로그래밍의 재현이 아니라 언제나 생명의 도약이다. 자신의 가능성을 세계 속에서 펼치는 일이다. 잠재 형태가 드러난 이 순간의 새를 작가는 “뜻밖의 기품”이라고 부른다.

생명의 발현을 경이롭게 보고 미적으로 응축한 것이 예술이다. 새들이 있는 곳은 미국 남부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있는 광활한 아우터뱅크스 해안 습지. 이곳에서는 “물이 하늘로 흐른다”. 어머니 물이 빛과 어우러져 대지와 하늘을 낳는다. 다리를 쭉 뻗어 날아오른 새들은 물의 힘을 하늘로 실어 나르면서 한 폭의 수채화를 그린다.

기품이란 무엇인가. 생명의 역동적 응축이고, 존재의 우아한 춤이다. 기품 없는 삶은 초라하다. 시적 언어 없는 생은 먹고삶의 잔혹한 쟁투에 지나지 않는다. 희랍인들은 자연을 퓌시스(phusis, physis)라고 불렀다. 이 말은 ‘성장하다(phuein)’에서 온 말이다. 자연은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스스로 자라고 변화해 자신을 항상 초월한다. 시공간 속에서 끝없이 자신을 새롭게 드러낸다. 지혜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연의 무한한 역동에 극도로 민감해지는 일이기도 하다. 어제 날아오른 새와 오늘 날아오른 새를 다르게 볼 줄 아는 힘, 오늘의 비행에 응축된 ‘뜻밖의 기품’을 음미하는 힘이 있는 사람만이 지혜롭다. 하루하루의 자연에서 차이를 느낄 줄 알 때, 인간은 비로소 기품을 얻는다.

광야에서 모세는 불타는 가시덤불을 마주친다. 성서는 모세가 도망친 양을 찾으러 가는 길이었다고 증언한다. 낮에 풀어 둔 양을 저녁에 거두려 찾는 법이니 황혼 무렵이었을 것이다. 날마다, 달마다 무심히 마주친 가시덤불이다. 언제나 저무는 햇빛을 받아 불타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의 황혼이 유난히 붉었는지 모세의 눈에는 가시덤불이 정말로 불붙은 것처럼 보였다.

언제나 신은 자연의 경이를 통해 말을 건넨다. 오늘의 가시덤불이 어제의 가시덤불과 다름을 느끼는 순간, 온 세계는 신의 기적으로 가득 찬다. 가시덤불의 물리적 실체는 어제와 오늘이 별다르지 않다. 그러나 모세의 눈에 오늘의 가시덤불은 불붙었으나 재로 변하지 않는 것, 즉 영원성의 현현이 된다. 세상에는 불 속에서 스러지는 덧없는 가시덤불만 있는 게 아니라 불꽃의 가혹한 시련을 견디는 가시덤불도 존재한다. 히브리인들은 존재의 새로운 모습이 드러나는 이러한 만남을 신이 말을 건네는 순간, 즉 은총으로 보았다.

과연 모세는 불타는 가시덤불로부터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신은 우리를 인도한다. ‘가까이’에서 물리적 눈으로 보면 이 나무는 황혼에 젖은 가시덤불이지만, 한걸음 떨어져 영혼의 눈으로 보면 거룩한 땅이다. 존재에서 존재 너머를 인식할 수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성스러움을 얻는다.

소크라테스는 신과 인간을 중재하는 내면의 이 소리를 다이모니온(daimonion)이라고 불렀다. ‘불가사의하다’ ‘신령스럽고 기묘하다’는 뜻이다. 마음에 울려퍼지는 이 신령한 목소리를 좇아서 사는 것이, 자연이 보이는 불가사의한 은총을 전적으로 맞이하는 것이 좋은 삶의 비결이다. 오늘 내가 마주친 이 하늘이, 이 땅이, 이 푸나무가 어제와 다름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 오늘은 지루하고 공허하고 무의미할 뿐이다. 가을이 지나간다. 우리의 감각은 자연의 변화를 어떻게 맞이하고 있는가.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신의 속삭임을 듣고 있는가.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