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이 올해 아이폰12를 발표할 때 가장 눈길을 끌었던 건 제품 자체가 아니라 충전기와 이어폰을 기본 구성품에서 뺀 것이었다. 당연히 줄 걸 안 주는 명분으로 애플은 환경 문제를 언급했다. 이미 전 세계 7억명이 라이트닝 단자 헤드폰을 가지고 있고, 20억개 넘는 애플의 충전기가 있기 때문에 신제품을 살 때마다 이걸 새로 주는 건 지구 환경을 위해 좋지 않다는 논리였다. 이런 노력이 연간 자동차 45만대를 줄이는 효과가 있으며 애플이 변화를 선도하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셀프 칭찬’까지 곁들였다.
하지만 의문이다. 애플이 정말 환경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이런 결정을 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아이폰12 제조 비용 상승을 상쇄하기 위한 결정으로 보인다. 아이폰12는 아이폰 최초로 5G를 도입했다. 삼성전자 등 다른 업체들도 5G 폰을 내놓으면서 가격을 올렸다. 부품 가격이 비싸기 때문이다. 애플은 충전기와 이어폰을 빼면서 원가절감을 하려 했다는 해석이 설득력 있다.
무엇보다 애플이 정말 환경을 생각했다면 혼자 별도의 규격을 쓰고 있는 충전단자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고 본다. 전 세계 스마트폰 제조사들은 USB-C 충전단자를 쓰고 있다. 스마트폰 초기에 마이크로USB를 쓰다가 최근 몇 년 사이에 대부분 USB-C로 갈아탔다. 애플만 유일하게 독자 규격인 라이트닝 단자를 쓴다. 다른 업체들이 독자 규격을 안 쓰고 싶어서 규격을 통일한 게 아니다. 통일된 규격을 쓰면 불필요하게 충전단자를 여러 개 만들거나 살 필요가 없어 낭비를 줄일 수 있다는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등장 이전만 해도 제조사마다 다른 충전단자를 사용했다. 그러다 스마트폰 태동기인 2011년 유럽연합집행위원회(EC)에서 전 세계 스마트폰 제조업체에 충전 규격을 통일하라고 했다. 모든 업체가 이후 마이크로USB 규격을 썼는데, 애플만 다른 길을 갔다. 애플도 다른 업체들과 같은 규격을 쓸 기회가 있었다. 애플은 이전에 사용하던 30핀 충전단자를 버리고 2012년 9월 라이트닝 단자를 도입했다. 다시 한번 다른 업체들과 규격 맞추는 걸 거부한 셈이다. 이때 애플이 라이트닝 대신 마이크로USB를 택했다면 표준 문제를 두고 왈가왈부할 일이 없었을 수도 있다. 애플이 독자노선을 걷는 건 기술력이 부족해서는 아니다. 독자 규격을 통해 자체 생태계를 공고히 하는 게 더 이익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테다. 실제로 애플은 아이패드 프로 라인업에 충전단자를 USB-C로 쓰고 있다. 애플이 마음만 먹으면 아이폰에도 다른 업체와 같은 충전단자를 쓸 수 있다는 얘기다.
올 초 유럽연합(EU)은 스마트폰, 태블릿PC, 전자책 등 휴대용 전자기기 충전 규격을 한 가지로 통일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전자 제품의 낭비를 줄이고 소비자들이 지속가능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무엇을 표준으로 할지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대부분 업체가 USB-C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이쪽으로 수렴할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표준 채택에 반대해 왔던 애플이 이번에는 어떤 선택을 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애플이 아이폰 발표에서 환경 문제를 운운하며 충전기와 이어폰을 뺐다는 자랑만 하지 않았어도 독자 규격을 고집하는 애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을 거 같다. 하지만 환경 문제를 중요시한다는 애플이 정작 환경을 위해 표준 규격을 일원화하자는 제안에 응하지 않는다면 진정성은 의심할 수밖에 없다.
김준엽 온라인뉴스부 차장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