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본 없는 대역전 드라마’라고 하면 너무 경박할까. 사실 65% 개표 상황에서 트럼프가 앞설 때 왠지 모를 짜릿함도 느꼈다. 경박함의 결정체지만 ‘한다면 하는’ 그를 보며 일각의 경외심도 생겼나 보다. 뒤늦게 ‘계산대’에 올려진 우편투표가 바이든 몰표로 확인되면서 안도감이 몰려왔다. ‘순천자존 역천자망(順天者存 逆天者亡).’ 하늘의 순리에 따르는 자는 살고, 거스르면 죽는다는 말이 현실이 됐다. ‘악마화’와 인종차별, 허장성세를 하늘의 순리라 부를 순 없는 법.
7110만표. 선거에 진 트럼프가 받은 이 많은 표에 하늘도 놀라긴 했을 거다. 전 세계 여론조사 달인들이 10% 이상의 차이를 장담했지만, 바이든과 트럼프의 표 차이는 3% 남짓에 그쳤다. 바이러스를 물리치고 경합주에서 종횡무진으로 움직인 트럼프의 막판 추격이 주효했다. 팬데믹의 어둠에서 경제복원의 희망을 지필 적임자는 결국 트럼프라는 생각이 꽤 단단했다. 밀레니얼 세대와 여성이 1억명이라는 역사적 사전투표 대열에 합류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바이든에게 사상 최고의 득표를 안기지 못했다면, 트럼프의 폭주는 계속됐을 거다.
이 극한 드라마를 시청한 정부 여당의 소회는 어땠을까. 아마도 각별했을 듯. 진보의 아이콘 바이든과 김정은의 친구 트럼프. 과연 누구를 응원했을까. 가치와 비전으로 따지자면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각별한 관계는 애초에 상상할 수도 없었다. 김정은이라는 제삼자가 개입되자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트럼프식의 편 가르기에 대한 전 세계적 반대 전선이 형성되는 동안 대한민국의 촛불 정부와 미국의 신권위주의 정부는 ‘밀월관계’를 시작했다. 2018년 남북평화 분위기가 국민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평화의 멜로디에 취할 즈음 위정자들은 이렇게 외쳤다. ‘우리가 믿을 건 트럼프뿐!’
새로운 파트너 조 바이든. 얼마나 몰랐고 무관심했으면 ‘엉클 조’ 인맥 찾기가 벌써 난항일까. 얼마나 정보가 없으면 말더듬이 소년 바이든까지 꺼내왔을까. ‘거친 언변을 거둡시다. 성질을 죽입시다. 서로를 바라보고 경청합시다. 경쟁자를 적으로 내몰지 맙시다. 그들은 적이 아닙니다. 미국인입니다.’ 바이든의 승리 연설은 조 아저씨가 무색무취가 아님을, 가치와 상식을 존중하는 지도자임을 일깨운다.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껍질 안에 숨겨진 관용과 존중의 가치를 끄집어내는 정직한 지도자다.
‘그들은 적이 아닙니다!’ 이 일성이 우리에게 주는 울림은 크다. 편 가르기와 낙인찍기가 일상화된 우리의 정치와 삶 속에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소통과 통합을 이루겠다던 문 대통령의 취임 일성은 공허한 메아리로 지천을 떠돌고 있다. 사회통합도 공론화도 사실상 폐기처분됐다. 서초동과 광화문을 따라 나라가 두 쪽이 나고, 국민소통의 허울을 쓴 청와대 청원 게시판이 포퓰리즘을 부추기는 동안 민주주의의 내피세포는 곪고 있다. 적폐청산이 시퍼런 무기가 되고, 악마화의 대상은 국정농단 세력에서 사법부로, 검찰을 거쳐, 규제지역 주택 소유자, 그리고 코로나 확진자로 향했다. 급기야 윤석열 검찰총장은 악당 중 악당 ‘슈퍼빌런’으로 둔갑했다. ‘그들은 적이 아닙니다. 한국인입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2006년 저서 ‘담대한 희망’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치는 위험지역이 되었다. 편협한 이해관계가 설치고, 소수 그룹의 이데올로기가 자신들만의 절대선을 강요하고 있다. 새로운 정치가 필요하다. 우리를 미국인으로 한데 묶는 공감의 정치 말이다.’ 신진정치인 오바마의 직감은 정확했다. 분열과 악마화의 정치가, 내로남불의 정치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허무는가에 대해. 상식과 엄격함의 실종이 어떻게 정치를 두 동강 내는지에 대해.
바이든 당선인과 오바마 전 대통령의 철학이 진보의 시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에서 이토록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희대의 허풍쟁이 트럼프의 선전에 짜릿함을 느끼고, 한반도의 희망을 떠올리는 극한의 모순은 어디에서 생겨났나. 극단적 효용정치가 원칙과 가치를 저버리고 각자도생의 우울한 사회가 양심과 상식을 덮칠 때, 이 모든 불행한 사달이 생겨났다. 패권을 위해서라면 성폭력 피해자의 고통과 당헌 규정쯤이야 무시하고 버릴 수 있다는 천박한 정치풍토가 지속할 때, 모순과 사달은 계속될 것이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