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 노동자·특고… 전태일 시절 ‘시다’처럼 열악한 처지”

입력 2020-11-13 04:01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이 지난 2일 전태일기념관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노동 현실과 현안 등에 대한 생각을 밝히고 있다. 이 이사장은 1983년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제목으로 출간된 ‘전태일 평전’을 통해 전태일을 만난 게 삶의 전환점이 됐다고 말했다. 최현규 기자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 전태일(1948~70) 열사 서거 50주기를 맞았다. 전태일은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며 자신을 불살랐다. 그의 충격적인 죽음으로 우리 사회 지식층들은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에 눈길을 돌렸고 노동자들도 자각해 노동기본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1987년 민주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이후 비약적으로 성장한 한국 노동운동은 전태일의 분신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대 노총 등 노동단체들이 50년이 흐른 지금도 앞다퉈 ‘전태일 정신 계승’을 외치는 이유다.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청계천변 전태일기념관에서 이수호(71) 전태일재단 이사장을 만나 전태일의 유산, 변화된 노동 현장과 현안 등에 대해 물었다. 이 이사장은 교사 출신으로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위원장,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등을 지낸 노동계 원로다. 2015년 3월 제10대 재단 이사장을 맡았고 지난해 4월 문을 연 전태일기념관 관장을 겸하고 있다.

-전태일 정신을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연민, 인간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전태일은 재단사인 자기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봉제 견습공(시다)들을 위해 자기 몸을 던졌다. 나눔과 연대를 헌신적으로 실천했고 시대와 사회를 바꾸는 불굴의 정신을 보여줬다.”

-바뀌지 않는 현실에 좌절해 분신한 것 아니었나.

“분신은 스스로를 죽이면서까지도 목표한 바를 기필코 이루겠다는 결단, 결의라고 볼 수 있다. 그의 희생으로 삼동친목회 활동을 함께 했던 재단사 친구들과 마흔세 살의 평범한 어머니(이소선 여사)가 놀랍도록 변했다. 사회적 파장도 엄청났다. 당시 웬만한 대학들이 동맹휴학하고 기독교계와 문화예술계 등이 노동자들의 삶에 관심을 갖고 연대하는 토대가 마련됐다. 전태일의 신념이 없었다면 그런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전태일재단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

“분신 항거 이후 어머니 이소선과 삼동친목회 친구들이 주축이 돼 세운 청계피복노조가 전태일을 기억하고 그의 정신을 이어받고 발전시키는 역할을 해 왔다. 1981년 전태일 기념관 건립위원회가 출범했고 (사)전태일기념사업회를 거쳐 2009년 전태일재단으로 확대 개편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재단의 기본활동은 추모사업이다. 전태일 노동상과 문학상을 제정해 운영하고 있고 장학사업, 노동인권교육, 활동가 지원사업, 청년사업, 이주노동자 지원사업, 연대사업, 출판사업 등을 하고 있다.”

-열사 서거 50주기인데 특별히 집중하고 있는 게 있나.

“올해는 코로나19 창궐로 노동자와 소상공인의 삶이 더 어려워졌다. 그들을 지원하고 함께하는 사업을 여러 형태로 펼치고 있다. 전태일 50주기 학술 토론을 통해 전태일 정신을 오늘의 정세에 맞게 이론적으로 정립했고 연극, 음악, 미술 등 다양한 문화 활동을 중심으로 전태일 문화제도 열고 있다. 청계천 산책로에 기념 동판 깔기, 애니메이션 ‘태일이’ 제작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권리 강화에 기업과 자본은 부정적이다. 노동기본권이 왜 중요한가.

“노동기본권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의 횡포에 맞설 수 있도록 노동자에게 헌법이 부여한 최소한의 권리다.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주 내용으로 하기 때문에 노동 삼권이라고도 부른다. 자본주의는 시장경제를 중심으로 돈이 세상을 지배하는 체제다. 잘못 팽창하면 세상은 불균형 상태가 되는데 그것을 그 누구도, 그 어느 것으로도 막기 어렵다. 국가권력도 어쩌지 못한다. 자본의 야수적 횡포를 견제할 수 있는 건 단결된 노동자의 힘뿐이다. 그래서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이 노동기본권을 헌법으로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전태일 시대에 비하면 노동 환경이 대폭 개선되지 않았나.

“노동의 체제와 형태가 달라졌을 뿐 노동의 소외와 착취는 여전하다. 장시간 고된 노동으로 과로사가 속출하는 택배 노동자, 위험한 환경에 방치돼 산업재해로 희생되고 있는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전태일 시대의 시다들과 같은 처지 아닌가. 하청, 재하청이나 플랫폼 노동, 특수고용 등 교묘한 구조적 탄압에 노동자들이 시달리고 있다. 빈부격차 심화와 희망 부재로 상대적 박탈감은 훨씬 더 커졌다.”

-노동시장 양극화가 심각한데.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다. 양극화는 대기업 중심, 재벌 중심인 우리 산업구조와 맞물려 있다. 대기업들은 이윤 극대화를 꾀하기 마련인데 비용, 그중에서도 인건비를 줄이는 가장 손쉬운 방법에 매달려 왔다. 이를 위해 하청·재하청 구조를 만들고 비정규직을 늘려 구조적 차별을 해 온 게 양극화의 근본 원인이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이 작동하지 않는 구조를 대기업들이 주도해 만들었고 국가가 용인했다. 이에 불만을 표시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면 정부가 탄압하고 법원도 기업의 손을 들어줬다.”

-양대 노총 산하 정규직 노조들도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반대하고 있다. 양극화에 노동계는 책임이 없나.

“자기 이익만 절대시하고 경쟁이나 효율의 가치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다. 시험을 통한 채용은 정의롭고 공평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직장에서 비정규직으로 2~3년 일하며 쌓은 전문성의 가치는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고연봉 대기업 노조의 쟁의행위를 탐탁지 않게 보는 여론이 있다.

“대기업 노조가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건 착시에 따른 잘못된 인식이다. 자동차 노조만 해도 주축이 50대 노동자들이다. 20~30년 동안 기술과 기능을 축적해 온 숙련 노동자들인데 연봉 7000만원, 8000만원대 연봉을 과도하다고 하는 게 맞나. 자동차 회사들은 이익을 많이 내고 있다. 노조는 회사가 경영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노동자의 정당한 몫을 요구해 왔다.”

-현대차만 해도 평균 연봉이 1억원을 넘지 않나.

“잔업 등으로 노동시간이 늘어날 때야 가능한 연봉이다. 지금은 잔업이 거의 사라졌고 야간작업도 없다시피 하다 보니 임금이 사실상 줄었다고 한다. 자본가는 이윤을 더 늘리려고 자기 것을 내놓지 않고 있는데 노동자들에게만 그들의 몫을 줄여 하청업체에 나눠주라는 건 온당하지 않다.”

-양대 노총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비조직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개선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겠나.

“노조나 노동단체들도 사용자나 사용자단체들과 연대하고 협력해 이미 많은 일을 하고 있다. 단체협약 등을 통해 노사가 공동으로 기금을 마련해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거나 더 어려운 노동자를 지원하는 사업 등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노동계가 전태일 3법 제·개정을 요구하고 있는데.

“전태일 3법(근로기준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정법 개정,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은 유보당한 노동자의 최소한의 기본권을 확보하기 위한 법이다. 국제노동기구(ILO) 기본규약을 비준하려는 정부의 취지에도 맞고, 이른바 국제 표준에도 부합한다. 4차 산업혁명으로 노동의 형태가 다양해지고 사용자와 노동자의 경계도 모호해지고 있다. 특수고용직이나 플랫폼 노동 종사자들도 노동자로 인정해 노조 결성의 자유를 줘야 한다.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도 5인 미만 사업장으로까지 확대해 노동기본권을 모든 노동자에게 보장해야 한다. 산업재해 세계 1위의 부끄러운 현실을 개선하려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도 불가피하다.”

-제1 노총인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타협에 소극적인 것 같다.

“사회적 대타협에 대한 정의와 기준을 분명히 해야 한다. 사회적 대타협을 일회성 정치·사회적 이벤트나 성과주의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정부 주도가 돼서도 안 되고 서둘러서도 안 된다. 민주노총은 사회적 대타협을 제대로 하자는 것이지 소극적인 것은 아니라고 본다.”

-문재인정부의 노동정책을 평가해 달라.

“정규직 전환, 소득주도성장 등 노동 존중을 표방한 정책들의 방향은 옳았다고 생각한다. 출발은 괜찮았다. 하지만 정책들을 관철시키는 방식이 서툴고 끌고 나가는 힘이 부족했다. 야당과 보수언론의 집요한 공격, 국정 전반에 대한 비판에 최저임금 인상 문제가 맞물리면서 기가 꺾인 것 같다. 그럼에도 비정규직 정규직화, ILO 협약 비준, 노사 현안 해결 등을 위해 노력한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임기가 얼마 안 남았지만 심기일전해 한 걸음 더 나아갔으면 좋겠다.”

라동철 논설위원 rdchul@kmib.co.kr

[이슈 & 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