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인으로서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책의 원고를 읽을 때 종종 마음의 지진을 겪는다. 객관적인 눈으로 원고를 읽으려고 노력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독자로서의 본성을 미뤄두지 못하고 몰입한다. 올해 미국에서 출간된 화제의 논픽션을 번역 원고로 읽었다.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러스트벨트에서 일한 젊은 여성 노동자의 기록이다. 미국의 새로운 산업 변화에서 소외된 남성 중심의 철강업 노동 환경 속에서 저자인 엘리스 콜레트 골드바흐는 무엇을 겪고 느끼며 기록했을까.
“철강 노동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별 하나 없는 하늘 아래 용광로의 환한 불빛을 바라보면서 밤을 보낼 생각은 없었다”고 고백한 골드바흐는 어린 시절부터 고향인 클리블랜드의 산업 단지를 지나치며, 어른이 되면 먼 곳으로 떠나 세상을 변화시킬 일을 하리라고 상상했다. 공장에서 분출하는 매캐한 유황 냄새와 연기를 일상적으로 바라보며 자랐지만 본인이 그곳에서 일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학 졸업 후 금융 위기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고 학자금 대출 상환 등으로 빚이 늘어났다. 생계를 위해 페인트칠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살던 골드바흐는 제철소에 취직한다. 교수를 꿈꾸는 영문학과 졸업생이지만 돈이 필요했다. 일정한 임금 보장과 좋은 복지, 노조의 안전한 유대감 속에서 일할 수 있는 제철소의 정규직 노동자가 된 골드바흐에게 친구는 조언한다. “돈에 사로잡히면 안 돼. 돈에 익숙해지면 새 차 뽑고 새 집을 사.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갇히는 거야.” 꿈을 펼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이 필요해서 제철소에 취직했다는 것을 알기에 건넨 말이었다. 실제로 골드바흐는 제철소에 취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생활비 걱정을 하지 않게 됐고 통장 잔고도 넉넉해졌다. 산업재해의 공포와 불안, 성차별과 강도 높은 노동의 대가로 얻은 경제적 혜택이었다.
숙련공이 쓰는 노랑 안전모와 비숙련공의 주황 안전모로 각자 존재감을 확인하지만 서로를 잘 알지 못한다. 상상 밖의 큰 규모로 위험한 시설이 밤낮 없이 가동되는 러스트벨트의 노동은 혁신을 부르짖는 사회에서는 시대착오적이지만, 자동차산업과 가전제품산업은 러스트벨트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자부심 등이 묘하게 맞물려 무거운 공기가 돈다. 산업재해로 죽음을 맞은 동료들을 잊지 않기 위해 공장 여기저기에는 부고가 붙어 있다. 목숨 걸고 밥벌이하는 사람들, 과거의 영화와 현재의 쇠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저것이 마냥 남의 일일 순 없다는 냉엄한 진실을 일깨운다.
꿈을 꾸라고,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격려받고 자란 밀레니얼세대가 바라본 미국은 계층 간 분열이 심한 갈등의 나라다. 대졸, 밀레니얼세대, 여성, 그리고 철강 노동자로서 그녀는 분열된 두 세계의 보이지 않는 경계선에 걸쳐 있는 자신을 직시한다. 미국이 세계 제일의 나라이고 자유의 옹호자라고 배웠지만 현실은 꿈을 덮어버렸다.
“당신의 일자리를 빼앗는 이민자를 경계하라. 세계주의자들, 페미니스트들, 사회주의자들을 경계하라”고 소리치는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는 철강 노동자의 심정은 불안과 맞닿아 있다. 약한 것들을 무자비하게 뭉개버리는 사회에서 불안은 변화를 두려워하게 만든다. 골드바흐는 주장한다. “그는 우리 마음속의 선함을 훼손했다. 그는 우리가 지키기 위해 싸우는 그 모든 것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골드바흐는 마침내 세상을 바꾸기 위해 글쓰기를 선택했다. 어린 시절의 꿈을 제철소라는 현실과 어떻게 화해시킬까 꿈꾼 결과였다. 골드바흐는 자신의 길을 찾아 학교로 돌아온다. 공장과 학교, 두 세계를 오가며 넓어진 그의 눈에는 이후 어떤 세상이 담길 것인가. 이 원고만으로도 나는 그의 다음 걸음에 벌써부터 기대를 건다.
일하며 글 쓰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을 잃지 않는 밀레니얼세대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내 안에서 크게 울린다. 나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고. 안주하지 말라고.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