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적 연출(누군가는 쇼라고 했다)에 능한 이 정부에서 이건 좀 늦은 감이 없지 않나 싶었다. 김이 빠져도 한참 빠져서다. 문재인정부가 지난 1일부터 청와대 뒷산 북악산 둘레길 성벽의 바깥쪽(북측) 구간을 개방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일부 언론은 1968년 이른바 ‘김신조 사건’ 이후 굳게 닫힌 철문이 52년 만에 개방됐다며 의미를 듬뿍 부여했다. 하지만 북악산 성곽 탐방로 개방은 이미 2007년 노무현정부 때 시행됐다. 문 대통령은 그 바통을 이어받아 추가 개방한 것이다. 그러니 엄밀하게 따지면 새로운 등산로를 추가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라 ‘52년 만의 개방’이라는 표현은 과하다. 문 대통령이 친절하게 설명했듯이 “이번에 이쪽 부분이 개방됨으로써 누구나 안산으로부터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의 형제봉까지 쭉 연결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도 “이번 개방 의미는 접근로를 확대함으로써 명승으로 지정된 백악산(북악산)과 사적인 한양도성의 가치를 더 잘 보여주는 데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더라면 창의문 부근 토끼굴 입구에서 문 대통령이 군 경비병으로부터 넘겨받은 열쇠로 지금껏 진입로를 막았던 철문의 자물쇠를 열었을 때 ‘철커덩’나던 소리가 주는 감동은 배가됐을 것이다. ‘1·21사태 소나무’도 새롭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감동의 지점이 됐을 것이다. 그 소나무는 제 몸에 총탄을 15발이나 받아내며 청와대 등 뒤에서 우리 군경이 무장공비들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던 1968년 1월 21일의 사건을 증거한다. 노무현정부 들어 공개되며 남북 갈등 해소의 상징이 됐다.
비록 처음 공개된 건 아니더라도 남북 관계 정치 이벤트의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즉 감동의 유효기간 내에 북악산 탐방로 추가 개방이 이뤄졌다면 뉴스 가치가 떨어진 ‘1·21사태 소나무’도 새롭게 재조명됐을 수 있다.
문재인정부 들어 남북 관계는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진전됐었다. 매번 감동의 드라마가 연출됐다. 2018년 4월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에서의 정상 간 세기의 악수, 문 대통령의 ‘깜짝 월경’, 도보 다리 정상회담, 9월 문 대통령의 평양 능라도 경기장 연설, 두 정상 부부의 백두산 천지 인증샷…. 금방이라도 세상이 뒤집힐 거 같은, 뭐라도 이뤄질 것 같은 감동의 이벤트들이었다.
하지만 남북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의 정치적 이벤트가 준 열기의 기억이 민망해질 정도다. 오죽했으면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문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넥타이를 매고 4·27 판문점 선언 당시 연단 앞에 섰던 사실을 언급하며 “상징성과 의미는 언제와 같이 애써 부여했다는데, 그 내용을 들어보면 혐오감을 금할 수 없다”고 비아냥거렸을까.
남북 관계에 대한 기대감으로 한껏 고양됐던 감정은 이제 김빠진 사이다처럼 밍밍해졌다. 그 때문인지 북악산 탐방로 추가 개방 소식에 괜히 삐딱한 감정이 든다. 금강산 관광 재개나 개성공단 사업 등에 대한 어떤 진전도 없다는 사실이 새삼 상기됐기 때문이다.
남북 간, 북·미 간 정상회담이라는 세기적 이벤트는 도널드 트럼프라는 돈키호테형 대통령이 있었기에 가능한 측면도 있었다. 그 호기를 이 정부는 놓쳤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대통령을 모시는 장관들, 그 장관을 모시는 참모진이 너무 미국 눈치만 본다. 소극적이다. 용감한 놈이 없다”고 원색적으로 비판한 걸 기억한다.
미국 대선 결과 정권이 바뀌었다. 다행히 민주당의 바이든 정권이 북·미 문제에서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전략적 인내를 답습하지 않을 거라는 평가가 나오지만 남·북·미 관계 방정식이 복잡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문재인정부가 남북 관계에서 감동뿐인 쇼가 아니라 실질적인 성과를 보여줬으면 싶다.
미술·문화재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