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당 GDP가 600달러에 불과했던 1970년대 중반. 넉넉하지 않은 가정형편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일찍이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해 기술을 배우는 것이 당연시됐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정규점 명장의 유년 시절도 다를 바 없었다. 모두가 돈을 벌기 위해 농촌을 떠났던 시절, 기술을 배워 번듯한 회사에 취직하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어린 그라고 모를 리 없었을 터다. 공업고등학교 전기과에 입학한 그는 19살에 첫 직장에 취직했다. 그러나 마음 한쪽에는 못다 한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열정이 자리했다. 2년 동안 모은 급여로 등록금을 마련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 진학 후 밤낮으로 관련 지식을 배우며 자격 취득에 매진했다. 뒤늦은 군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정 명장은 “당시 대학 입학도 군 제대도 늦은 것투성이였지만 꿈은 한결같았다. 조국 근대화의 기수가 되겠다는 일념이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었다”고 회상했다.
제대 후 정 명장은 청운의 꿈을 품고 포스코에 입사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365일 밤낮으로 가동되는 제철소는 그 특성상 전기설비에 문제가 생기면 공정이 중단된다. 설비를 최상의 상태로 보전해야 하는 정비부서는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누군가가 전기설비 관련 도움을 요청하면 신속히 해결해야 하는데 입사 초기의 그에겐 모든 게 어렵고 서툴렀다.
정 명장은 “입사 전 전기에 대해 좀 안다고 생각했지만, 현장은 이론과 달랐다”며 “그래서 ‘전기가 눈에 보이게 하자’는 목표를 세웠었다”고 말했다. 전기 흐름이 사람의 눈에 보일 리 없을 터.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일 만큼 뼈를 깎는 열정을 다하겠다는 의지로 전문지식을 보완하기 위해 틈나는 대로 서적을 뒤적였고, 핵심 기술이나 자료는 노트에 빼곡히 적기 시작했다. 그렇게 취득한 국가전문기술자격증만 15개다. 그의 남다른 자료 욕심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끈기 있게 물고 늘어지면 해결하지 못할 것은 없다는 되새김은 지론이 됐다.
그러나 많은 이론을 습득했더라도 현장에서는 늘 새로운 상황이 펼쳐졌다. 매일 아침 업무 목록을 적고 중요 순서를 정해 놓았지만, 긴급한 기술지원 요청에 무용지물이 되기 일쑤였다. 대형 설비의 장애는 생산성 감소와 직결된다. 특히 정규점 명장이 담당한 전력 설비는 작은 실수라도 ‘블랙 아웃’(Blackout 정전)이라는 큰 파장을 불러오기에 잠시도 방심할 수 없었다.
“아내는 한밤중에 걸려오는 긴급한 업무지원 전화를 대신 받아 자는 저를 깨우곤 했습니다.” 업무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그의 책임을 아는 아내의 배려였다. 집안 경조사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는 가장임에도 집을 나서는 그에게 “얼마나 급하면 이 시간에 연락했겠어요. 조심히 다녀와요.”라며 응원을 해준 아내에게 항상 고마웠다고. 가족의 든든한 지원을 받는 정 명장은 늘 ‘안정된 조업, 생산성 향상’이란 목표를 되뇌며 정비 업무에 임한다. 조업 중단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만들지 않기 위해 35년간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은 그는 안정 조업을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과제를 수행했다.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자부심을 느낀 것은 3선재공장 22KV GCB(특별고압차단기) 합리화다. 당시 투자 예산이 약 18억원 정도로 책정됐지만, 교체 대상 전력 설비의 사용 빈도가 적어 재활용을 제안했다. 결국 마모성 자재만 교체해 약 2억원으로 정비작업을 마쳤다.
그는 독보적인 전기설비의 신속한 트러블 슈팅(Trouble Shooting) 기술로 국내는 물론 해외 생산기지의 조업피해 최소화에도 기여했다. 지난해 포항제철소의 전력 인프라 설비 고장 시간은 114시간 수준이었다. 전력 설비가 고장 나면 조업을 멈춰야 하고 이는 곧 생산성 저하로 이어지므로 신속한 복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업무에 대한 그의 헌신과 열정은 조업 안정화에 따른 생산성과 경쟁력 향상으로 이어졌다. 정 명장은 신증설 설비 조기 안정화와 대형 설비 장애 예방활동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2008년 ‘올해의 포스코인’에 선정됐다. 지난해에는 경북의 기술 발전에 이바지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경상북도 최고 장인에도 이름을 올렸다. 35년의 세월이 흘러 ‘명장’으로 불리는 기술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아쉬움이 남는 순간들도 있다. 현장에서 경험한 핵심 노하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못한 지난날과 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다면 막을 수 있었던 사고들이 그것이다.
그래서인지 정 명장은 기술 전수와 후배 양성에 공을 들이고 있다. 2012년 대한민국 산업현장교수 활동을 시작으로, 2017년 NCS(국가직무능력표준) 집필위원, 한국산업인력공단 능력개발 전문가 및 국가기술 자격검정위원으로 활동하며 후배들의 기술력 향상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앞으로도 취약설비를 개선하고 평생 쌓아온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수해 직원 전체가 주인의식을 갖고 소통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계획이다. 인터뷰를 마치며 정 명장은 “포스코의 미래는 소신껏 행동하고 솔직하고, 똑똑한 후배들에게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후배들이 애사심을 갖고 기술적으로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도록 핵심기술 자료를 정립하겠다. 기술 전수 교육에 힘써 회사의 정비 기술력 향상에 힘을 보탤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임중권 쿠키뉴스 기자 im9181@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