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불행한 전직 대통령들’은 오랫동안 관심을 가졌던 주제였어요. 제가 두 대통령을 모셨는데, 특히 노무현 대통령만큼은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다음에 대통령 하겠다는 분들이 자문을 구하면 이 말씀부터 여쭤봤어요. ‘그렇게 불행하게 안 될 자신이 있느냐, 왜 불행하게 됐는지 생각해봤느냐.’ 제대로 대답해 주는 분은 없었어요.”
이명박 전 대통령이 횡령과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징역 17년형이 확정돼 재수감된 다음 날인 지난 3일 라종일(80) 가천대 석좌교수를 만났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반복된 우리 대통령들의 참담한 말로에 대해 고민한 ‘한국의 불행한 대통령들’이란 책을 최근 펴낸 그는 김대중정부에서 국가정보원 제1차장과 영국대사를 지냈고, 노무현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 일본대사를 역임했다.
4년째 수형 생활을 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까지 전직 대통령 두 명이 다시 동시에 수인복을 입고 있는 상황은 대통령 개인에게도 불행이지만 존경할 만한 전직 대통령 한 명 갖지 못한 국민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전직 대통령들의 불명예가 계속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자랑스럽지 않은 ‘대통령 잔혹사’를 끊을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지 라 교수와 전화와 메일로도 추가 질문과 답을 나눴다.
-영국대사 시절 일화가 인상적이었습니다.
“2002년 16대 대선 직후 노무현 대통령직 인수위에서 귀국하라고 전화가 왔어요. 친한 현지인 몇 분과 자리를 만들었는데, 한국 대통령은 거의 예외 없이 끝이 좋지 않으니 거기 휘말리지 말고 대사를 계속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만류하는 거예요. 새삼 충격을 받았습니다. 권위주의 정부, 군사정권의 대통령이 불행한 건 이해가 되죠.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고,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라고 여겼는데 이후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까지 자손들이 감옥에 가고 불행해지는 걸 보면서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마치 대통령의 비극이 한국 정치의 특징이 돼버린 것 같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퇴임 이후는 다르리라 생각했다고 하셨는데, 가까이에서 지켜보신 노 전 대통령은 어떠셨나요.
“노 대통령은 늘 시골로 은퇴해서 편안하게 살겠다고 했는데 결국 그렇게 안 됐죠. 일가의 뇌물수수 의혹이 있었지만 다른 원인도 있지 않았나 생각해요. 본인은 시골로 내려가면서 정치와 멀어졌다고 하지만 뒤에 정권을 잡은 사람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거죠. 살아 있는 권력이라고 생각하고, 그 권력이 위협이 된다고 느끼고.”
-정권이 바뀌면 되풀이되는 문제라는 말씀인가요.
“이명박 대통령만 그런 게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 역시 그랬어요. 같은 진영 내에서 정권이 이양됐는데도 노 대통령이 대북송금 특검 승인을 했고, 결과적으로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심한 타격이 됐어요. 김 대통령이 후임자를 의식해서 동교동계를 자진 해체했는데 상당수 측근들을 사법처리했어요. 조금 무리하게까지. 대부분 무죄였거나 항소를 안 하는 조건으로 사면을 받았어요. 그리고 민주당을 깨고 열린우리당을 만들었지요. 마치 옛날에 왕조 하나가 무너지고 다른 왕조가 서면 그전 왕조의 잔재를 다 없애거나 정치적으로 거세하는 것처럼.”
-대통령 개인의 권력욕, 가족의 비리, 측근들의 잘못이 크겠지만 왕조 시대의 군왕 같은 제왕적 대통령제 때문에 같은 문제가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대권’이라는 말부터 그래요. 민주주의에 맞지 않는 건데 계속 쓰고 있죠. 대통령이 되면 헌법에 보장되지 않은 권한까지 행사해요. 헌법에 내각을 조직하는 권한은 총리에게 있는데 청와대가 하는 게 상식으로 통하죠. 행정부 관리 임명까지 청와대가 합니다. 그게 정말 대통령의 뜻인지 대통령 측근의 뜻인지 알 수 없어요. 제가 ‘천민 공직윤리’라고 하는데, 대통령이 바라는 것 같은 눈치면 법에 좀 어긋나더라도 아래에서 대통령의 뜻에 맞게 적당히 처리하고, 그러면 나중에 책임은 또 대통령한테 가겠죠.”
-제왕적 대통령제 외에도 5년 단임제가 장기 독재를 막는 대신 상대방에 대한 관용과 포용이 없는 ‘승자 독식’을 낳는다고 분석하셨습니다. 장기적으로 내각제나 중임제가 불행한 대통령을 줄이는 방안이 될 수 있을까요.
“저는 회의적이에요. 철학자 존 듀이가 헌법을 자꾸 고치는 나라는 병자라고 했어요. 누워 있다가 어디가 아프면 자세를 바꿔보고, 다른 데가 아프면 또 바꿨다가, 다른 데가 아프면 다시 바꾸고. 건강한 사람은 자세를 자꾸 바꿀 필요가 없죠. 영국은 헌법 자체가 없고 미국도 헌법이 굉장히 단단한 개념이잖아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4년이 참 엉터리였지만 그렇다고 미국에서 제도를 바꿔야겠다는 얘기는 안 하니까요.”
-그래도 제도에 문제가 있다면 수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사람이 제도를 그렇게 운영하기로 하면 바꿔도 소용이 없어요. 이번에 여당이 당헌을 바꿔서 부산과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후보를 내겠다고 하는 건 분명히 잘못이에요. 그런 식으로 운영한다면 제도를 바꾼다고 바꿔놓은 제도대로 하겠어요? 저는 현재 우리나라 정치 상황이 개헌을 할 정도의 능력도 없다고 생각해요. 한쪽이 3분의 2 이상을 차지해서 강행한다면 모를까, 합의가 안 되리라고 봅니다.”
-검찰이 죽은 권력에만 매몰차고, 살아 있는 권력과 미래 권력에 부합하는 수사를 하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검찰 개혁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를 말하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정치권이 검찰을 편리하게 쓰다가 당하는 것 아닌가요? 정치권력이 개입해서 사법적인 과정을 왜곡하거나 훼손하는 일이 없어야 해요. 권력자들이 공수처를 자기 정치적인 목적에 맞도록 사용하기로 하고, 자기 좋은 사람들을 임명하기로 한다면 공수처라는 기구 하나 만든다고 문제가 해결될까요? 기구를 만들었는데 개선이 안 되면 또 다른 기구를 만들 건가요?”
-그렇다면 어떤 대안이 있을까요.
“김대중 대통령도 취임 후에 검찰을 동원해서 옛 정적인 김영삼 대통령에게 복수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예를 들어 김영삼 대통령은 대선 기간에 쓴 자금이 284억원이라고 신고했는데 노태우 대통령 회고록을 보면 3000억원을 지원했다고 했어요. 그런 걸 파내서 곤란하게 할 수 있었는데 포용했어요. 그리고 자기한테 사형선고를 한 전두환을 비롯해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 다 같이 부부 동반으로 저녁 대접을 했어요.”
-김대중 대통령의 방식을 일종의 선례로 삼자는 말씀인가요.
“저는 좋은 선례였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안 되더라고요. 제일 좋은 것은 대통령들이 사법처리당할 일을 안 하고 깨끗하게 흠결 없이 임기를 마치는 것이고요. 흠이 있더라도 전직 대통령이 다수의 국민이 선택했던 사람이라는 걸 존중하고 어느 정도 참작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칫 불법이 있었어도 묵인하자는 것으로 오해를 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두 전임 대통령이 수감될 때 박수친 국민도 많았습니다.
“제가 늘 주장하는 게 정치가 훌륭해서 사회가 잘되는 게 아니고, 사회가 건전해서 정치가 잘되는 거라는 겁니다. 지금 같은 구조로는 대통령이 불행하지 않기가 참 힘들어요. 지금 또 두 명이 감옥에 있는데 ‘아, 꼴좋다’, 이렇게 얘기한다면 참 멍청한 짓입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트럼프 대통령이 법정에 서는 것을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었는데, 전직 대통령을 기소하는 것은 ‘매우 매우 특별한(very very unusual) 일이며 민주주의에 그렇게 좋은 일도 아니다’라고 대답했어요.”
-우리나라처럼 사법처리된 대통령이 많은 건 다른 나라에 유례가 없죠.
“이렇게 계속되는 데는 없죠. 미국도 리처드 닉슨과 빌 클린턴을 탄핵했지만 그렇게 안 했어요.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는 엄격하게 따지자면 감옥에 갈 수도 있었어요. 이라크전쟁에 참전하는 명분이 사담 후세인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거였는데 조작된 정보였잖아요. 그런데 참전해서 엄청난 희생을 냈죠. 그것 때문에 청문회를 했는데 총리가 형사책임을 져야 한다는 얘기는 안 나왔어요.”
-바이든 얘기를 하셨지만, 미국은 트럼프가 첫 번째 사례가 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아마 안 하리라고 봐요. 한 번 대통령을 감옥에 넣으면 자꾸 해야 할 거예요. 권력이라는 건 부패할 수밖에 없는데, 그 기준이 되니까.”
-사회가 발전해서 정치를 이끌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불행의 고리가 끊어지기까지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시민의식이 제고돼야 하죠. 저는 비관적이지 않습니다. 2차 대전 후에 독립한 나라 중에 이만큼 경제는 물론 민주적인 성취를 이룬 나라가 없어요. 그런데도 그런 성취를 이끈 대통령들의 말로가 왜 모두 불우할까요. 대통령께서 이제 5년 동안 수고하고 나면 개인으로 돌아가서 편안하게 계시면 좋겠어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재수감된 직후 야권에서 ‘통 큰 사면’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견해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사면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오래 가둬두는 건 옳지 않습니다. 다만 박근혜 대통령은 아직 법절차가 끝나지 않았고, 이 대통령도 바로 사면을 하는 게 현실적일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군요. 이 대통령은 사법절차를 거쳐서 실형 언도를 받았는데 본인이 ‘진실을 가둘 수 없다’고 했으니, 현실적으로 사면을 고려하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입니다.”
권혜숙 인터뷰전문기자 hskw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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